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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뛰어넘는 법: GMT 워치

없으면 섭섭한 여행 필수품

  • 이상우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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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뛰어넘는 법: GMT 워치

내 첫 시계는 GMT 워치였다. 독일 브랜드 진(Sinn)의 856UTC라는 시계였는데, ETA 2893-2가 탑재되어 별도의 바늘로 24시간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때는 갓 입문한 초보자 수준이었고, GMT 워치는 전부 같은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내가 머물던 경험의 타임존 바깥에는 정말 다양한 GMT 워치가 있었고, 작동 방식과 사용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856UTC는 두 개의 시간대를 표시하긴 했지만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시계였다. 장거리 여행 중에는 시간대를 넘나들 때마다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메인 핸즈만 빠르게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ETA 2893-2(혹은 셀리타 SW330-2)는 24시간 핸즈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메인 핸즈를 조정하려면 결국 크라운을 2단에 놓고, 시·분침을 모두 맞춰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 진(Sinn) 856UTC

시침만 조정이 가능한 ‘진짜’ GMT 워치가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해당 기능이 탑재된 시계를 구입해서 해외 출장 때 착용해 봤는데, 크라운을 뽑아서 시침만 한 칸씩 조작하는 경험이 꽤 근사했다. 바늘 하나 움직이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국경을 넘는 시간 속에서 그 간단하고 직관적인 조작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사실 GMT라는 건 지구에 가상의 선을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내 몸이 다른 시간대로 진입한다고 해도 그것이 당장 물리적인 변화로 체감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중에 시차 적응으로 되돌아오지만) 나에게 GMT 워치의 시침은 공간 이동의 물리적 징표 같은 것이다. 물론 현지 시간을 파악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계식 GMT 시계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나의 물리적 이동을 물리적인 조작으로 시각화 혹은 동기화시킨다는 점이다. 물성을 지닌 바늘은 내 육체가 ‘그때 그곳’을 떠나 ‘지금 여기’로 이동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리킨다. 그건 디지털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 고유의 감각이기도 하다. 

GMT라는 건 지구에 가상의 선을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두 가지 GMT 워치

이처럼 바늘이 두 개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GMT 워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브먼트의 구조에 따라 GMT를 표시하는 방식, 조작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시계 업계에서는 이 두 가지를 지칭하는 표현이 어느 정도 합의되어 있는데, 시계 애호가들이 흔히 쓰는 용어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트래블러(traveler) GMT’다. ‘플라이어(flyer) GMT’ 또는 ‘트루(true) GMT’라고도 불린다. 롤렉스 GMT-마스터 II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방식에서는 시침이 분침·초침과 분리되어, 한 시간 단위로 앞뒤로 독립적으로 점프한다. 24시간 핸즈(홈 타임)는 원래 자리에 가만히 머문다. 비행기에서 내려 크라운을 당기고 시침만 현지 시각으로 옮기면 끝이다. 분침과 초침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기 때문에 시계의 정확도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트래블러 GMT를 대표하는 롤렉스 GMT-마스터 II

둘째는 ‘콜러(caller) GMT’, 혹은 ‘오피스(office) GMT’라고도 한다. 내가 구입했던 856UTC가 바로 이 부류다. 여기서는 반대로 24시간 핸즈가 독립적으로 조정된다. 현지 시각을 가리키는 중앙 시침은 일반 3핸즈 시계처럼 분침에 고정되어 있고, 별도의 24시간 핸즈만 따로 움직여 두 번째 시간대를 가리킨다. ETA 2893-2, 셀리타 SW330-2, 세이코 NH34 등 비교적 낮은 가격대의 GMT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3핸즈 베이스 무브먼트에 24시간 핸즈 하나만 얹으면 되기 때문에 제작이 단순하고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보급형 GMT 워치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유다.

사실 이런 시계들은 엄밀히 말해 ‘여행용’ 시계라기보다는 해외 바이어들과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무용’ 시계다. 즉, 한자리에 머물면서 해외에 있는 가족, 친구, 혹은 거래처 직원의 시간을 확인하고 통화 가능한 시점을 가늠하는 용도인 것이다. 반면 트래블러 GMT는 실제로 시간대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외모는 비슷하지만, 트래블러 GMT 쪽이 훨씬 더 여행자의 시계라는 용도에 걸맞다.

  • ETA 2893-2 기반의 BR-CAL.303을 탑재한 벨앤로스 BR-03 GMT

시계와 여행의 공존

왜 여행용 시계는 시침을 독립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할까? 바로 전 세계 시간대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정확히 한 시간 단위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대를 넘는 여행에서 변하는 것은 ‘내가 지금 있는 곳의 시각’뿐이다. 분과 초는 변하지 않는다. 트래블러 GMT는 분과 초, 그리고 홈 타임을 유지한 채 시침만 한 시간씩 점핑시킬 수 있다. 한 번의 조작으로 ‘지금 여기’를 갱신하면서, ‘내가 떠나온 곳’의 시각을 그대로 보존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콜러 GMT로 같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지 시각을 바꾸려면 크라운을 시간 설정 위치까지 당겨 중앙 핸즈 전체를 돌려야 한다. 이때 초침이 멈추고(해킹), 분침도 함께 움직이므로 정밀하게 맞춰둔 시·분이 흐트러진다. 시간대를 옮길 때마다 시계 전체를 다시 세팅하는 셈이다. 한자리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편리한 구조일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여행 상황에서는 꽤 번거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 동작은 감성 차원에서 여행의 흐름을 깨뜨린다. 기계식 시계는 여행의 모든 시간을 간직하고 기억하는 물건이다. 시침만 점핑시키는 트래블러 GMT 워치는 시계를 멈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행의 모든 과정이 끊이지 않고 기록된다. 시계와 여행이 하나의 흐름 속에 공존하는 셈이다. (퍼페추얼 캘린더 워치가 사용자의 실제 시간과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흘러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반면 핸즈 전체를 일일이 조작해야 하는 콜러 GMT 워치는 시간을 정지시키는 과정에서 여행의 흐름을 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꾸만 손목 위 도구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신체와 시간이 여행이라는 물리적 과정에 통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운 셈이다. 

푸셔로 시침을 조작할 수 있는 로랑 페리에 스포츠 트래블러

세계표준시의 탄생과 GMT 워치 개념 정립

당연하지만 GMT 워치라는 것은 ‘세계표준시’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에 탄생했다. 다시 말해 그 이전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표준 시간이라는 게 없었다는 얘기다. 각 마을과 도시에서는 태양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했고, 따라서 서로 다른 현지 시간을 사용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여러 지역이 같은 시간을 공유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대륙횡단열차를 안전하고 정확하게 운행하려면 단일 표준시가 반드시 필요했다. 최초의 표준시 또한 철길 위에서 탄생했다. 1879년 캐나다의 철도 엔지니어 샌포드 플레밍(Sandford Fleming)은 전 세계를 24개의 구역을 나눈 표준시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다. 이후 1883년 11월 미국과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철도 시간을 통일했고, 1884년 10월 국제 자오선 회의(International Meridian Conference)에서 그리니치 경선을 본초 자오선(Prime meridian)으로 공식 채택했다. 마침내 세계표준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1879년 세계 최초로 표준시 개념을 제안한 샌포드 플레밍

세계표준시라는 개념 자체는 샌포드 플레밍이 제안했지만, 이를 현실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시계공학적 해법을 제시한 것은 독일의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이었다. 그는 1885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강연에서 ‘세계시와 시민 생활 입문(Universal Time and the Introduction to Civilian Lif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기술적, 실용적 측면에서 세계표준시(Universal Time)와 현지 시간(Local Time)의 공존 방안을 제시하고, 오늘날 GMT 워치의 표준을 확립한 선구적인 논문이었다. 모리츠 그로스만은 대륙을 이동하는 여행에서 서로 다른 현지 시간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설명했다. 또한 세계 시간이 현지 시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각 도시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현지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워치메이커였던 그는 새로운 시간 체계를 시계공학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핵심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시계 다이얼에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바늘을 추가해 현지 시간과 세계 시간의 차이를 읽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GMT 워치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모리츠 그로스만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할 수 없었다. 1885년 1월 강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아이디어가 실제 시계로 구현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GMT 워치의 이론적 기반을 세운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

두 개의 시간대를 표시하다

론진(Longines)은 19세기 말부터 여러 시간대를 다루는 문제에 천착한 브랜드였다. 1908년, 론진은 오스만 제국의 주문을 받아 터키 시간과 서구 시간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회중시계를 제작했다. 이른바 ‘터키 워치(Turkish Watches)’다. 두 세트의 시침과 분침으로 서유럽과 터키의 시간을 동시에 표시하는 이 회중시계는 최초의 듀얼 타임존 회중시계였고, 론진은 1911년 이 혁신을 특허로 확보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그로스만의 논문으로부터 20여 년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 세계표준시라는 개념이 국제 회의에서 채택되고(1884), 시계공학적 해법이 논문으로 제시되고(1885), 그 해법이 실제 제품으로 구현되기까지(1908) 거의 한 세대가 걸린 셈이다. 그렇게 새로운 시간 체계가 인간의 일상에 도착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08년 론진이 제작한 듀얼 타임 포켓워치

그리고 1925년, 론진은 듀얼 타임 개념을 손목으로 옮겼다. ‘줄루 타임(Zulu Time)’이라 명명된 이 시계는 두 개의 시간대를 표시한 최초의 손목시계였다. 이 시계의 다이얼에는 12시 방향 아래에 작은 항해 신호기가 그려져 있었다. 이 깃발은 알파벳 ‘Z’를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 ‘제로 메리디안(Zero Meridian, 경도 0도로 정의되어 동서 경도의 기준점이 되는 자오선)’에 대한 오마주였다. 군용 무선 통신에서 ‘Z(줄루)’는 그리니치 표준시를 가리키는 문자였고, 따라서 줄루 타임은 GMT 혹은 오늘날의 UTC와 같은 의미였다.

시계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GMT 워치와는 사뭇 달랐다. 1925년의 줄루 타임은 아르데코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시계답게, 둥근 케이스의 현대적 후손과는 달리 각진 사각 케이스와 장식적인 숫자 인덱스를 갖추고 있었다. 현대의 GMT 워치가 24시간 트랙 위를 도는 하나의 바늘을 갖는 것과 달리, 이 디자인은 중앙에 두 세트의 시침과 분침을 두고, 초침만 서브 다이얼에 배치했다. ‘시계 다이얼에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바늘을 추가해 현지 시간과 세계 시간의 차이를 읽는다’는 그로스만의 해법이 정확히 손목 위에서 구현된 것이다.

1925년 론진이 제작한 줄루 타임

GMT 워치의 문법을 정립하다: 롤렉스 GMT-마스터

줄루 타임이 듀얼 타임 개념을 손목 위로 가져 왔으나, 오늘날 ‘GMT 워치’라고 부르는 시계는 대개 롤렉스 GMT-마스터의 문법을 따른다. 즉 현대적인 GMT 워치의 출발점을 묻는다면 역시 롤렉스 GMT-마스터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롤렉스가 GMT-마스터 Ref. 6542를 선보인 것은 1954년이다. 팬암(Pan American World Airways)과의 협업으로 개발된 이 시계는, 국제선 비행 중 현지 시각과 GMT를 동시에 추적해야 하는 항공기 조종사를 위해 설계되었다. 베이스 칼리버 1030을 개조해 24시간 핸즈를 더한 칼리버 1065를 탑재했고, 24시간 핸즈는 하루에 정확히 한 바퀴를 돌았으며, 양방향 회전 베젤을 돌려 현지 시각에 맞춘 뒤 홈 타임을 읽을 수 있었다. 수집가들이 ‘펩시’라 부르는 레드&블루 베젤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최초의 GMT-마스터는 여행에 최적화된 트래블러 GMT 워치가 아니었다. 이 시계의 24시간 핸즈는 개별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시침이 서로 연결되어 같은 시각을 가리켰고, 다른 시간대를 확인하려면 베젤을 한 시간 단위로 돌려서 맞춰야 했다. 그렇다면 시침을 독립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여행용 GMT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1954년 출시된 롤렉스 GMT-마스터 Ref. 6542 ⓒhairspring.com

시침을 독립시키다: 파텍 필립 Ref. 2597

초대 GMT-마스터로부터 4년 뒤인 1958년, 파텍 필립은 Ref. 2597을 선보였다. 이 시계는 케이스 왼편의 두 개의 푸셔를 누르면, 시침이 앞뒤로 한 시간씩 점프했다. 중요한 것은 이 조작이 분침의 운행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크라운을 뽑을 필요도, 시계를 손목에서 풀 필요도 없었다. 이 메커니즘의 이름은 ‘외르 소탕트(Heures Sautantes)’, 즉 점핑 아워였다. 제네바의 시계공 루이 코티에가 1953년 프로토타입을 완성했고, 파텍 필립은 1957년 코티에를 발명자로 명시해 1959년 스위스에 특허를 등록했다. 특허의 명칭은 ‘타임존 워치(Time Zone Watch)’였다. 루이 코티에는 오늘날 월드타이머의 발명자로 더 유명하지만, 시침을 독립적으로 점프시키는 이 메커니즘 역시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1958년의 1세대 2597은 시침이 하나뿐이었다. 시침을 독립적으로 조정할 수는 있었지만, 두 시간대를 동시에 표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2년 두 번째 시침이 더해지면서 홈 타임과 현지 시각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독립 조정 시침을 갖춘 진정한 트래블 GMT 워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1958년 등장한 파텍 필립 Ref. 2597

  • 두 번째 시침이 더해진 2세대 Ref. 2597 (1962년)

그렇다면 코티에의 해법은 곧바로 표준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Ref. 2597은 총 90점가량만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은 Ref. 3619(1976년)도 10년의 생산 기간 동안 50점 남짓에 그쳤다. 파텍의 독립 시침 계보는 끊기지 않았지만, 그것은 극소수를 위한 컴플리케이션이었을 뿐 시장의 문법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사이 시장의 주류는 여전히 롤렉스 방식이었다. 1954년의 초대 GMT-마스터부터 1999년 단종된 마지막 Ref. 16700에 이르기까지, GMT-마스터는 무려 45년간 시침과 24시간 핸즈가 연동된 구조를 유지했다. 이는 롤렉스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글라이신의 에어맨(1953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침을 독립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이 비로소 대중적 표준이 된 것은 1982년, 롤렉스가 칼리버 3085를 얹은 GMT-마스터 II Ref. 16760을 내놓으면서다. 루이 코티에가 해법을 제시한 지 24년 만이었다.

GMT-마스터 II Ref. 16760 ⓒSotheby’s

조작의 스펙트럼: 시간대를 넘는 방법

트래블러 GMT의 시침 조정 방식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가장 익숙하고 또 일반적인 것은 크라운을 한 칸 당겨 시침을 돌리는 방식이다. 그밖에도 케이스 측면의 푸셔를 눌러 시침을 점프시키는 방식, 베젤을 돌려서 시침을 점프시키는 방식, 별도의 크라운을 회전시키는 방식 등이 있다. 이런 다양한 조작 방식은 각 브랜드가 여행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크라운: 롤렉스 GMT-마스터 Ⅱ

가장 익숙하고, 그래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이다. 크라운을 한 칸 뽑아 돌리면 시침만 한 시간 단위로 점프한다. 이 방식의 원형은 물론 롤렉스 GMT-마스터 Ⅱ다. 현행 모델에 탑재되는 칼리버 3285는 크라운을 첫 번째 포지션에 놓고 돌리는 것만으로 시침을 시간 단위로 조정할 수 있으며, 24시간 핸즈는 홈 타임을 유지한다. 크로너지 이스케이프먼트와 파라크롬 헤어스프링으로 70시간 파워 리저브도 확보했다. 튜더는 롤렉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블랙 베이 58 GMT에 탑재된 인하우스 칼리버 MT5650-U가 대표적이다. 이 무브먼트는 마스터 크로노미터(METAS) 인증을 받아, 15,000가우스에 이르는 자기장 테스트까지 통과했다. 롤렉스의 절반 이하 가격에 사실상 같은 기능을 담아낸 셈이다. 

  • 칼리버 3285를 탑재한 롤렉스 GMT-마스터 Ⅱ

  • 칼리버 MT5650-U를 탑재한 블랙 베이 58 GMT

그랜드 세이코 역시 이 영역에서 오랫동안 강자였다. 9S66, 9S86(하이비트 36,000vph), 그리고 스프링 드라이브를 결합한 9R66까지 모두 시침 독립 조정을 지원한다. 특히 스프링 드라이브 GMT는 무브먼트를 멈추지 않고 현지 시각으로 시침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 중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트래블러 GMT의 이상에 가장 충실하다. 한편 론진은 100년 전 자신들이 시작한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스피릿 줄루 타임에 탑재된 칼리버 L844.4는 COSC 인증을 받은 트래블러 GMT로, 시침과 GMT 핸즈를 모두 독립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칼리버 9S66을 탑재한 그랜드 세이코 SBGM221

오랫동안 시침 독립 조정은 사실상 럭셔리 브랜드의 전유물이었다. 반면 대중적 가격대의 GMT는 ETA 2893-2나 셀리타 SW330처럼 24시간 핸즈만 조정되는 콜러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애호가들은 오랫동안 합리적인 가격대의 트래블러 GMT 워치를 갈망해왔다. 변화의 신호탄은 2020년 미도 오션 스타 GMT였다. ETA C07.661을 기반으로 한 이 시계는 시침만 점프하고 24시간 핸즈는 그대로 유지되는, 1000달러대의 스위스산 트래블러 GMT 워치였다. 세이코의 행보는 더 극적이다. 6R64는 그랜드 세이코 아래 등급에서 처음으로 시침 독립 조정을 구현한 무브먼트로, 프레사지 샤프 엣지드 GMT를 통해 1,500~2,500달러대에 트래블러 GMT를 가져왔다. 

미도 오션 스타 GMT

이 두 시계보다 가격대는 다소 높은 편이지만 몽블랑 1858 지오스피어에 탑재되는 칼리버 MB 29.25 역시 셀리타 베이스에 모듈을 올린 월드타이머 무브먼트로, 크라운 1단 포지션에서 시침만 독립 조정할 수 있다. 태그호이어는 과거 GMT 워치에 ETA 2893-2(혹은 셀리타 SW330-2) 기반의 ‘칼리버 7’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자체 제작 칼리버 TH31-03으로 교체되는 추세다. TH31-03는 80시간으로 파워리저브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침 독립 조절이 가능한 트래블러 GMT 기능을 제공한다.

칼리버 TH31-03을 탑재한 태그호이어 까레라 데이트 트윈 타임

푸셔: 파텍 필립 아쿠아넛 트래블 타임

파텍 필립의 푸셔 방식 GMT 워치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대표작이 바로 파텍 필립 아쿠아넛 트래블 타임(Ref. 5164)이다. 케이스 왼편의 2개 푸셔를 누르면 현지 시각을 한 시간 단위로 양방향 조정할 수 있고, 날짜 역시 현지 시각을 따라가며, 하루 전으로 거슬러 점프해야 하는 경우까지 반영한다. 두 번째 시간대 핸즈는 여행하지 않을 때 메인 시침 아래에 포개져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다이얼을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기능을 숨겨두는 이 절제는, 파텍 필립이 컴플리케이션을 절제된 다이얼에 녹여내는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크라운 회전이 아니라 버튼의 명료한 클릭으로 시간대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푸셔 방식은 ‘여행이라는 행위’를 한층 직관적인 신체 동작으로 번역해낸다. 

파텍 필립 아쿠아넛 트래블 타임 Ref. 5164

이러한 푸셔 방식 또한 오늘날 여러 브랜드로 퍼져 있다. 랑에 운트 죄네의 랑에1 타임 존은 8시 방향 푸셔를 작동하면, 시티 링이 한 칸씩 이동한다. 동시에 서브 다이얼의 아워 핸드가 한 시간씩 앞으로 이동하면서 해당 도시의 시간을 표시한다. 골드 소재의 화살 모양 마커가 해당 타임 존을 가리키며, 링 모양의 낮/밤 디스플레이와 일광 절약 표시 기능까지 갖췄다. 한편 위블로의 빅뱅 유니코 GMT는 마치 크로노그래프 시계처럼 크라운 위아래에 푸셔를 배치했다. 푸셔를 눌러서 시침을 한 시간 단위로 움직일 수 있으며, 두 푸셔가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막는 안전 장치까지 갖췄다. 로랑 페리에의 스포츠 트래블러 역시 좌측 2개의 푸셔로 시침을 한 칸씩 조정하며, 9시 방향 창에 24시간을 표시한다. 

랑에 운트 죄네 랑에1 타임 존

모리츠 그로스만의 유니버설자이트는 마치 크라운 방식과 푸셔 방식을 합쳐놓은 듯한 설계다. 10시 방향의 크라운으로 시침을 조정하는데, 11시 방향으로 돌린 뒤 누르면 시침이 뒤쪽으로 점핑하고, 9시 방향으로 돌린 뒤 누르면 시침이 앞쪽으로 점핑한다. 크라운이 중립 상태일 때는 푸셔를 작동할 수 없도록 설계해 의도치 않게 핸즈가 이동하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전 세계 7개 지역의 시간을 동시에 표시하는 디스플레이 역시 독창적이다. 

모리츠 그로스만 유니버설자이트 ⓒKlocca

푸셔 방식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해석 중 하나는 파르미지아니의 톤다 PF GMT 라트라팡테다. 이 브랜드는 스플릿세컨드 크로노그래프의 원리를 초침이 아니라 시침에 이식했다. 다이얼에는 브랜드 특유의 델타 형태 시침 두 개가 포개져 있다. 로듐 도금 골드 핸즈는 현지 시각을, 그 아래 숨은 로즈 골드 핸즈는 홈 타임을 가리킨다. 8시 방향 푸셔를 누르면 현지 시각 핸즈가 한 시간씩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까지는 여느 푸셔 방식과 같다. 진짜 묘미는 돌아올 때다. 크라운에 통합된 로즈 골드 버튼을 누르면, 현지 시각 핸즈가 마치 스플릿세컨드 크로노그래프의 핸즈처럼 순식간에 홈 타임 핸즈 자리로 되돌아가 다시 포개진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행위가 하나의 버튼 클릭으로 완결되는 셈이다. 라트라팡테의 메커니즘을 ‘초를 쪼개는 도구’에서 ‘시간을 되찾는 도구’로 변신시킨 멋진 재해석이다. 

파르미지아니 톤다 PF GMT 라트라팡테 ⓒKlocca

베젤: IWC 파일럿 워치 타임 존

IWC는 조작의 주도권을 베젤로 옮겼다. 파일럿 워치 타임존은 크라운이나 푸셔가 아닌, 베젤을 회전시켜 시간대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 시계의 베젤에는 24개 도시가 새겨져 있다. 베젤을 케이스 쪽으로 눌러 내린 뒤 원하는 도시를 12시 방향에 맞추고 놓으면, 시침과 24시간 핸즈, 그리고 날짜까지 한꺼번에 이동한다. 국제 날짜 변경선을 넘는 경우까지 인식해 날짜를 하루 앞뒤로 조정하며, 서머타임을 시행하는 도시에는 ‘S’ 표시가 붙어 있다.

이 기술은 원래 미하엘 포크트(Michael Vogt)가 설립한 독립 브랜드 보가드(Vogard)의 것이었다. 포크트는 1997년 ‘시간대를 옮길 때마다 복잡한 조정이 필요없는 GMT 워치’를 생각했고, 6년의 개발 끝에 2003년 바젤월드에서 프로토타입을 선보였다. 그의 해결책은 베젤을 무브먼트의 일부로 만들어, 베젤을 돌리면 크라운 휠과 미니어처 클러치를 거쳐 시침이 즉각 조정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소규모 공방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기술이었다. 포크트는 자신의 기술을 실현할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2014년 특허 일체를 IWC에 매각했다. IWC는 여기에 자사 기술을 얹었다. 케이스 측면의 거대한 레버를 없애고, 1980년대 포르쉐 디자인 오션 2000에 처음 쓰였던 스프링 장착 회전 베젤(두 지점을 동시에 눌러야만 움직인다)을 결합한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대형 브랜드의 자원을 만나 비로소 대중에게 도달한 사례로, 앞서 코티에와 파텍 필립의 관계에서 보았던 구도가 21세기에 다시 반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IWC 파일럿 워치 타임 존

GMT 워치, 진짜 여행의 시작

과거 856UTC를 구입할 때 B-Uhr 스타일의 한정판을 동시에 놓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파일럿 워치라면 역시 GMT 기능이 있어야지”라는 생각에 856UTC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처럼 GMT 기능은 그 존재만으로도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실제 여행에서 불편하긴 했지만 작은 24시간 핸즈만으로도 파일럿 워치의 감성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했다. 1958년 파텍 필립이 90점 남짓 만들었던 컴플리케이션은, 이제 대부분의 기계식 시계에 들어간다. 루이 코티에가 제네바의 공방에서 풀어낸 문제를 오늘날 우리는 몇십만 원짜리 시계에서도 누린다. 그 과정에서 여러 브랜드가 저마다의 답을 내놓았다. 사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손끝으로 시침을 한 칸 옮기는 그 감각이 아닐까. 그 짧은 조작 안에서, 우리는 ‘그때 그곳’을 떠나 ‘지금 여기’에 도착한다. 그래서 해외 출장을 갈 때는 일부러 기계식 GMT 워치를 챙긴다. 공항을 빠져나오며 크라운을 뽑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진짜 여행의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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