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부터 이어진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의 RD(Research and Development) 시리즈는 그저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한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다. RD 시리즈의 본질은 새로운 소재와 메커니즘 그리고 디자인 언어를 개발하여 브랜드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이를 양산 제품에 이식하기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는 RD 시리즈는 오데마 피게 복잡 시계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RD#1은 1년 만에 콘셉트 라인에서 상용화된 이후 여러 시계로 전이됐고, RD#2는 동일한 두께를 유지한 채 소재와 외관을 달리한 부티크 에디션으로 이어졌다. RD#3는 점보라는 대체불가한 존재의 틀 안에 투르비용을 투입했고, RD#4는 수많은 기능을 담아내는 와중에도 실제 착용을 고려한 사용자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RD 시리즈가 지적 허영이 아닌 설계, 생산, 특허 전반을 아우르는 시계 개발의 핵심 파이프라인임을 의미한다.
RD 시리즈의 기원은 콘셉트 워치에서 찾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로열 오크 탄생 30주년인 지난 2002년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 콘셉트(Royal Oak Concept)를 출시했다. 오데마 피게는 이 콘셉트 워치를 통해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 한편 첨단 기술과 전통적인 노하우를 활용해 시계 제작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했다. 최초의 로열 오크 콘셉트는 알라크라이트 602(Alacrite 602) 합금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소재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가벼우면서도 매우 강한 강성을 지닌 알라크라이트 602는 항공 산업에서 주로 사용되는 소재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과 과감한 시도는 지난날 오데마 피게가 보여준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데마 피게는 150개만 생산하고 끝내기로 했던 당초의 계획을 수정했다. 2008년 후속작인 로열 오크 콘셉트 카본 투르비용 크로노그래프를 공개하며 로열 오크 콘셉트를 정규 컬렉션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이후 로열 오크 콘셉트 GMT 투르비용, 로열 오크 콘셉트 랩타이머 미하엘 슈마허 같은 매력적인 제품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번 이야기의 주제인 RD 시리즈가 탄생했다.
2015년 오데마 피게는 마침내 로열 오크 콘셉트 RD#1(Royal Oak Concept RD#1)을 공개했다. RD#1은 미닛 리피터라는 고전적인 컴플리케이션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방점을 뒀다.
손목시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케이스의 방수 성능과 내구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이 과정에서 미닛 리피터의 음량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 오데마 피게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2006년부터 무려 8년에 걸쳐 로잔 연방공과대학(EPFL)과 음향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워치메이커, 엔지니어, 학자, 음악가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는 케이스의 구조와 리피터 메커니즘을 완전히 재검토해야 했다. 이와 더불어 오래된 회중시계와 현악기에서 영감을 받아 음향에 대한 기술적 관점을 새로이 정립했다.
오데마 피게의 목표는 명징한 소리를 연주하면서 방수 성능까지 지닌 미닛 리피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미닛 리피터의 방수 성능과 소리는 상충한다. 미닛 리피터는 대게 방수 성능을 지원하지 않는다. 미닛 리피터를 작동시키는 슬라이딩 레버의 존재와 이로 인한 케이스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만약, 방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케이스를 완전히 밀폐한다면 소리가 크게 줄어드는 부작용이 따른다. 이에 오데마 피게는 일반적인 시계라면 메인 플레이트에 고정했을 공(Gong)을 사운드보드(Soundboard)라는 별도의 부품에 부착해 소리를 증폭시키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기타를 생각하면 원리를 이해하기 쉽다. 사운드보드가 기타의 몸통이라면 공은 기타줄에 해당한다. 해머가 공을 때리면 사운드보드가 공의 진동을 증폭시키고, 케이스 밖으로 소리를 전달한다. 티타늄으로 제작한 케이스는 흡음을 최소화하는 구조로 설계했다.
미닛 리피터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최대한 억제해 순수한 음을 전달하려는 노력도 빠뜨릴 수 없다. 미닛 리피터의 템포를 결정짓는 레귤레이터(또는 거버너) 역시 혁신의 대상이었다. 이 레귤레이터는 빠르게 회전하는 와중에 의도치 않은 소음을 발생시킨다. 오데마 피게는 새로운 레귤레이터를 개발하여 맑고 깨끗한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RD#1의 기술적 원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공의 위치를 무브먼트에서 사운드보드로 옮겨 진동의 경로를 변경한 것. 두 번째는 케이스의 구조 변경을 통해 소리의 공명을 안정시킨 것. 끝으로 레귤레이터를 개선해 잡음을 없앤 것이다.
RD#1의 놀라움은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능성과 현대적인 미학을 강조한 티타늄 케이스는 물론이고 슈퍼소네리 메커니즘이 드러나는 오픈워크 다이얼, 크로노그래프와 투르비용의 결합을 통해 하이 컴플리케이션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런 와중에도 전통적인 마감 기법을 고수하면서 르 브라쉬의 전통을 따르는 수호자의 본분과 시계 제작의 예술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오데마 피게는 이듬해인 2016년 곧장 RD#1의 상용화 버전인 로열 오크 콘셉트 슈퍼소너리(Royal Oak Concept Supersonnerie)를 발표했다. 혁신이 현실로 바뀐 순간이었다. 로열 오크 콘셉트 슈퍼소너리는 RD#1에서 구현했던 음향학적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었다. 15분 단위 시간을 알려주지 않아도 될 때 시와 1분 단위 시간 시퀀스 사이에 생기는 음의 공백을 최대 50%까지 단축시켰다. 사용자가 미닛 리피터 작동 시 시간을 조정할 수 없도록 안전 장치도 구비했다. 케이스는 티타늄과 블랙 세라믹을 조합해 한층 더 세련된 형태로 거듭났다.
로열 오크 콘셉트 슈퍼소네리는 ‘현대 시계 제작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음향을 다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오데마 피게의 명쾌한 해답이었다. 무엇보다 전통을 지키는 것을 넘어 미닛 리피터의 예술적, 기술적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 모델이었다.

로열 오크 셀프와인딩 퍼페추얼 캘린더 울트라-씬 RD#2(Ref. 26586PT.OO.1240PT.01). 두께가 2.89mm에 불과한 칼리버 5133 덕분에 케이스 두께를 6.3mm까지 줄일 수 있었다. 케이스는 플래티넘으로 제작했다.
RD#1이 출시된 지 3년 뒤인 2018년 오데마 피게는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RD#2를 공개하며 다시 한 번 기술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로열 오크 셀프와인딩 퍼페추얼 캘린더 울트라-씬(Royal Oak Selfwinding Perpetual Calendar Ultra-Thin)으로도 불린 RD#2는 얇은 케이스 안에 퍼페추얼 캘린더이라는 고전적인 컴플리케이션을 담아냈다. RD#2는 자랑스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얇은 오토매틱 퍼페추얼 캘린더 시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퍼페추얼 캘린더 시계가 이토록 얇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데마 피게가 무브먼트의 구조를 송두리째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RD#2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통합과 재배치다. 전통적인 퍼페추얼 캘린더 무브먼트는 베이스 무브먼트에 갖가지 형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캘린더 모듈을 층층이 쌓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이 방식대로라면 무브먼트가 두꺼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무브먼트의 두께를 얇게 하기 위해서는 다층 구조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오데마 피게는 영리하게도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캘린더 모듈을 한 층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서는 월의 마지막 날을 다루는 말일 캠(end-of-the-month cam)을 날짜 톱니바퀴(date wheel)와, 월 캠(month cam)을 월 톱니바퀴(month wheel)와 각각 합쳐야 했다.
날짜 톱니바퀴에는 독특하게 생긴 이빨과 홈이 하나씩 있다. 월의 마지막 날을 표시하고 월 톱니바퀴(month wheel)를 앞으로 한 칸 전진시키기 위해서다. 월 캠과 통합한 월 톱니바퀴는 48개월에 한 바퀴 회전하며 월의 마지막 날을 계산한다. 마지막 날이 31일인 달에는 레버가 가장 얕은 구멍에, 마지막 날이 30일인 달에는 레버가 그보다 약간 더 깊은 구멍과 맞물린다. 가장 깊은 4개의 구멍은 2월에 해당하는데 4개의 구멍 중 하나는 다른 3개보다 깊이가 얕다. 여기에 레버가 걸리면 그 해 2월의 말일은 29일이다. 다시 말해, 윤년이라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부품을 기하학적 구조로 가공하고, 부품 간의 움직임과 배치를 최적화해 조립과 조정 시간을 단축시켰다. 캘린더 모듈의 평탄화를 통해 부품 간의 간섭은 줄어들었고, 동력의 경로는 단순해졌다. 이는 두께가 줄어들었지만 내구성과 정확성 측면에서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오데마 피게는 퍼페추얼 캘린더 메커니즘의 고도화와 생산 효율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를 동시에 달성한 것이다.
통합에 이어 부품을 재배치하는 작업도 뒤따랐다. 부품의 통합만으로는 원하는 만큼 두께를 줄일 수 없었다. 이에 부품을 최대한 넓게 퍼뜨리는 방향으로 무브먼트를 설계했다. 2015년에 선보인 퍼페추얼 캘린더 칼리버 5134의 지름이 29mm인 반면 RD#2의 칼리버 5133은 32mm로 3mm나 늘어났다. 칼리버 5133은 지름을 내어준 대가로 더 얇은 두께를 얻을 수 있었다. 지름이 4.31mm인 칼리버 5134도 얇은 두께로 찬사를 받았지만 칼리버 5133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께가 고작 2.9m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칼리버 5134와 비교하면 1.41mm가 얇고, 전임자인 2120/2800과 비교하면 1.05mm 더 얇은 수치였다. 설계 변경은 시계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리버 5134와 달리 RD#2에서는 문페이즈가 6시에서 12시 방향으로 이동했고, 요일을 비롯한 날짜와 월 카운터도 자리를 바꿨다. 본래 월 카운터에 통합했던 윤년 인디케이터와 새롭게 추가한 낮/밤 인디케이터도 중앙에서 살짝 아래로 치우친 곳에 안착했다.
무브먼트가 얇아지니 케이스도 덩달아 얇아졌다. RD#2의 케이스 두께는 6.3mm로, 9.5mm인 이전 세대의 퍼페추얼 캘린더보다 두께가 3.2mm나 줄어들었다. 수치가 와닿지 않을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시간만 알려주는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씬의 두께가 8.1mm다.
RD#1과 마찬가지로 오데마 피게는 RD#2 출시 1년만인 2019년에 상용 모델인 로열 오크 퍼페추얼 캘린더 울트라-씬(Ref. 26586IP-OO-1240IP.01)을 선보였다. 다이얼의 그랑 타피스리 패턴을 새틴 브러시드 마감으로 변경하는 등 디테일을 변경했고, 얇은 두께에서 비롯하는 시각적 쾌감을 촉각으로도 즐길 수 있도록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의 소재를 티타늄으로 변경했다(주: 베젤과 브레이슬릿의 폴리시드 마감한 작은 링크의 소재는 플래티넘이다). 몇 가지 수정을 거쳤지만 핵심인 칼리버 5133만큼은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로열 오크의 탄생 반세기를 기념하며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씬(Royal Oak “Jumbo” Extra-Thin)을 내놓았다. 이 시계는 칼리버 2121의 대체자인 칼리버 7121을 품었다. 50년간 이어진 혁신의 궤적을 기리는 방법은 과연 새로운 로열 오크 점보가 전부였을까? 당연히 오데마 피게의 대답은 “아니오” 였다. 오데마 피게는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플라잉 투르비용을 장착한 로열 오크를 앞세워 점보를 재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로열 오크 셀프와인딩 플라잉 투르비용 엑스트라-씬 RD#3(Ref. 26670ST.OO.1240ST.01). 로열 오크 점보라는 가장 이상적인 크기와 비율의 럭셔리 스포츠 워치에 플라잉 투르비용이라는 컴플리케이션을 담아내며 로열 오크 점보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로열 오크 셀프와인딩 플라잉 투르비용 엑스트라-씬 RD#3(Royal Oak Selfwinding Flying Tourbillon Extra-Thin RD#3)는 로열 오크 점보라는 정해진 규격 안에 플라잉 투르비용을 담아내는 난제를 다뤘다. 셀프와인딩 투르비용은 구조적 한계로 인해 크기가 넉넉한 케이스에 탑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오데마 피게는 기어트레인과 투르비용 케이지를 얇은 케이스에 맞춰 최적화하고, 부품의 두께를 얇게 줄이는 동시에 경량화에도 초점을 맞췄다.
5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완성한 칼리버 2968은 두께가 3.4mm로, 로열 오크 점보에 사용한 칼리버 7121보다 고작 0.2mm 두꺼울 뿐이다. 플라잉 투르비용을 추가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수치다. 칼리버 2968의 본바탕은 칼리버 7121이라고 볼 수 있다. 오실레이터의 형태나 위치는 다르지만 배럴이나 와인딩 메커니즘 등 기본적인 설계는 차이가 없다.
칼리버 2968의 얇은 두께는 페리퍼럴 드라이브(Peripheral drive)라고 하는 구동 방식에서 기인한다. 보통은 케이지 하단에 있는 피니언에 톱니바퀴를 물려 투르비용을 회전시키지만 페리퍼럴 드라이브는 투르비용 케이지와 한 몸을 이루는 톱니바퀴 모양의 링에 동력을 전달해 투르비용을 돌리는 구조다. 추가로 오데마 피게는 투르비용 케이지를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티타늄으로 제작해 에너지 전달 효율을 높였다. 무브먼트가 얇으면 메인스프링을 비롯한 여러 부품을 그에 맞춰 얇게 제작해야 하는데 이는 에너지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에너지 전달 효율을 고려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플라잉 투르비용은 다이얼에 맞게 높이를 정교하게 조정했고, 이스케이프먼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투르비용 케이지와 밸런스 휠 암을 가공했다. 이 시계가 셀프와인딩이라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로열 오크 50주년 기념 모델에만 적용한 근사한 로터가 특별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RD#3는 39mm에 이어 37mm 모델로도 출시됐다. 지름만 2mm 줄었을 뿐 두께는 8.1mm로 달라지지 않았다. 구조는 동일하지만 소재, 다이얼, 젬 세팅 여부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칼리버 2968은 수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투입됐다.
RD#3는 전작과는 결이 달랐다. 양산 제품으로 온기가 퍼지기 전 프로토타입으로 선보인 RD#1과 RD#2와는 달리 RD#3는 처음부터 로열 오크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정규 모델로 등장했다. RD#1과 RD#2가 기술적 한계를 시험하는데 집중했다면 RD#3는 점보의 재해석과 보편화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브랜드의 상징과 같은 점보를 새로이 제안하고, 여성 고객을 컴플리케이션의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37mm 모델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RD#3를 기점으로 오데마 피게는 시장과 고객의 요구에 부응해 RD 시리즈의 방향성을 재정립했다. 이 같은 변화는 이어지는 RD#4에서도 감지된다. 물론 RD 시리즈가 그간 일관되게 보여준 혁신이라는 가치는 흔들림 없이 견조했다.

오데마 피게가 1899년에 제작한 유니버셀 회중시계. 19개의 컴플리케이션을 포함해 총 26개의 기능을 갖췄다. RD#4의 목표는 이 거대한 회중시계를 손목시계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시리즈의 네 번째 장을 연 것은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울트라 컴플리케이션 유니버셀 RD#4(Code 11.59 by Audemars Piguet Ultra-Complication Universelle RD#4)였다. 2016년 개발에 돌입해 장장 7년에 걸쳐 완성한 이 시계는 오데마 피게의 모든 역량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로열 오크가 아닌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의 디자인 언어를 토대로 오데마 피게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컴플리케이션을 통합해 브랜드 역사상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를 완성했다. RD#4가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컬렉션에서 나온 이유는 아마도 RD#4의 복잡함과 오데마 피게가 이제껏 생산한 케이스 가운데 가장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는 점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899년에 제작한 유니버셀(L’Universelle) 회중시계를 계승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RD#4는 인체공학적 설계를 중심으로 실제 사용과 사용자 편의성에 주안점을 뒀다.
시계의 케이스는 지름 42mm, 두께 15.55mm. 셀프와인딩 칼리버 1000의 지름은 34.3mm, 두께는 8.8mm다. 1,140개(오픈워크 모델은 1,155개)나 되는 부품으로 만든 무브먼트는 23개의 컴플리케이션과 17개의 특수한 장치까지 총 40개의 기능을 갖췄다. 다시 봐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수치다.
RD#4에는 오데마 피게가 그간 RD 시리즈를 통해 달성한 기술 혁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슈퍼소네리는 RD#1을 모델로 삼았다. 칼리버 1000에는 사운드보드 역할을 담당하는 두께 0.6mm의 얇은 사파이어 크리스털 멤브레인(Membrane)이 있다. 해머가 공을 때리면 사파이어 크리스털 멤브레인을 통해 소리가 증폭된다. 투명한 사운드보드는 소리를 더욱 아름답고 멀리 퍼지게 해주는 동시에 무브먼트를 노출시켜 보는 재미를 살렸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멤브레인을 덮는 헌터백 스타일의 시크릿 커버는 케이스 4시 방향에 설치한 레버를 눌러 열 수 있다.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확보하여 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측면에 공기가 통과할 수 있는 통풍구를 마련했다. 슈퍼소네리는 미닛 리피터, 그랑 소네리, 미닛 소네리로 세분화된다. 미닛 리피터는 현재 시간을 시, 15분, 1분 단위로 알려준다. 그랑 소네리는 매시 정각과 15분 단위 시간을, 프티 소네리는 매시 정각에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준다. 슈퍼소네리 전용 버튼을 눌러 활성화 및 비활성화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슈퍼소네리는 동력 전달을 최적화하고 다른 기능과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별도의 배럴로부터 동력을 전달받는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당연하게도 RD#2를 참고했다.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을 단층으로 통합한 RD#2의 해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두께를 줄이기 위해 부품을 최대한 넓게 퍼트렸다. 그로 인해 다이얼에서 제공하는 캘린더 정보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다. 여기까지는 RD#2와 같지만 RD#4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2100년까지 코딩이 되어 있는 일반적인 퍼페추얼 캘린더는 2100년이 되면 사용자가 개입해야 한다. 그레고리력에 의하면 1년은 365.2425일으로 실제 태양년과는 미세한 차이가 난다. 편의성을 추구한 대가로 그레고리력은 4년마다 하루씩 오차가 발생한다. 이 오류를 보완하고자 4년의 배수인 해를 윤년으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4의 배수인 해가 반드시 윤년인 것은 아니다. 4의 배수인 동시에 100의 배수인 해는 평년으로, 400의 배수인 해는 윤년으로 계산해야 하는 예외 조항이 있다.
RD#4는 그레고리력을 기반으로 한 퍼페추얼 캘린더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준-그레고리력(Semi-Gregorian) 계산법을 도입했다. 월의 마지막 날과 윤년을 조율하는 프로그램 톱니바퀴를 변경해 윤년을 따로 계산한다. 48개월을 기준으로 하는 평범한 퍼페추얼 캘린더의 프로그램 톱니바퀴와 달리 RD#4는 36개월을 고정 값으로 삼는다. 윤년 계산은 별도의 윤년 캠이 대신 처리한다. 그 결과 RD#4는 100의 배수인 해, 예를 들면 2100년이나 2200년 또는 2300년에 시계를 조작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400의 배수인 2400년에는 따로 조정을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400년간 3번 조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1번으로 줄인 것이다.
RD#4의 플라잉 투르비용은 RD#3에서 연유했다. 밸런스 스프링은 평평한 형태에서 오버코일로 바뀌었고,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안쪽에 무게추를 설치한 밸런스 휠도 고전적인 스크루 밸런스 휠로 변경했다. 미친듯이 얇은 두께보다는 실사용에서의 안정성에 무게를 실은 결정으로 보인다. 어쩌면 유니버셀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허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RD#4는 최적화된 이스케이프먼트를 포함한 새로운 오실레이터를 사용한다. 에너지 전달 효율은 최고조에 이르고, 밸런스 휠은 높은 관성과 큰 진폭을 가진다. 이는 안정성의 향상으로 귀결된다. 기하학적 구조로 설계한 이스케이프먼트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전달받은 밸런스의 임펄스 주얼이 원호를 그린 뒤 팰릿 포크의 바깥쪽을 때리는 오버 뱅킹을 방지한다. 메인스프링에서 생성된 동력은 작동에 문제가 없는 한도 내에서 최고의 정확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밸런스로 전달된다.
RD#4는 RD 시리즈에서 선보였던 여러 해결책 외에도 다양한 기술적 성취로 가득하다. 6개의 달의 위치를 인쇄한 2개의 디스크를 결합해 달의 위상을 표시한다. 문페이즈 디스크는 날짜가 바뀜과 동시에 즉각 반응하여 달의 위상을 표시한다. 퍼페추얼 캘린더와 완벽하게 연동되는 문페이즈 기능은 달의 모습과 주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칼리버 1000을 제작하는데 있어 가장 큰 과제는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기능을 담으면서도 서로 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과 편안한 착용감을 위해 무브먼트의 무게를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이었다.
계측과 관련된 기능은 크로노그래프 외에도 두 측정 대상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스플릿 세컨즈와 조작의 간소화를 통해 신속한 계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플라이백까지 추가했다. 크로노그래프를 작동하는 과정에서 초침이 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전용 회전 클러치(Swivel clutch)를 개발했다.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은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셀프와인딩 메커니즘과 통합을 이뤄냈고, 눈에 띄지 않는 요소들을 이용해 감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스플릿 세컨즈 기능을 수행하는 톱니바퀴를 비롯해 클램프, 스프링, 레버 등은 볼 베어링 방식으로 회전하는 중앙 로터와 한 몸을 이룬다. 두 구조를 합친 설계 덕분에 무브먼트의 두께를 1.1mm나 줄일 수 있었다.
이 시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혁신 가운데 하나는 사용자 편의성을 위한 단순화에 있다. 수많은 장치와 기능은 별도의 도구 없이 오로지 케이스에서 돌출된 크라운과 버튼 만으로 제어할 수 있다. 복수의 버튼과 커렉터를 가진 여타 복잡 시계와는 대조적이다. 이 시계가 가진 기능의 수를 감안하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는 3개의 버튼과 3개의 크라운으로 모든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설정 및 조정할 수 있다. 케이스 오른쪽에 있는 3개의 슈퍼크라운(Supercrown)에는 모두 버튼을 삽입했다. 3시 방향의 슈퍼크라운을 시계 방향이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시계의 구동과 차이밍 메커니즘을 관장하는 2개의 배럴을 와인딩할 수 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크라운을 한 칸 뽑으면 된다. 2시 방향의 슈퍼크라운은 차임 모드(그랑 소네리 / 프티 소네리 / 무음)를 설정하는데 쓰인다. 버튼을 누르면 크로노그래프가 작동하거나 멈춘다. 4시 방향의 슈퍼크라운을 돌리면 월을 조정할 수 있다. 월은 앞으로 넘기거나 뒤로 되돌릴 수 있다. 버튼을 누르면 크로노그래프 바늘이 원점으로 회귀한다. 이 슈퍼크라운은 방향에 관계없이 최대 70°까지 회전했다가 원래 위치로 돌아오는데, 오작동을 방지하는 보안 설계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케이스 왼쪽에는 3개의 버튼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각각의 버튼에는 기능을 상징하는 각인이 새겨져 있다. 초승달은 문페이즈, WD는 요일, 높은음자리표는 미닛 리피터를 의미한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혁신의 공존을 상징하는 RD 시리즈에는 수백 년에 걸친 시계 제작의 노하우와 미래를 향한 비전 그리고 시계 예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도전이 담겨 있다. 기계식 시계는 여전히 진화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던진 오데마 피게의 RD 시리즈는 이제 최종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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