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워치스 앤 원더스 제네바 2026이 끝난 지도 두 달이 됐다. 촘촘한 스케줄과 끝도 없이 밀려오는 신제품의 홍수 속에 시계 하나하나를 제대로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일정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기억의 편린을 엮어가며 복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몇 가지 시계가 떠올랐다. 페르디낭 베르투(Ferdinand Berthoud)의 크로노미터 FB 2TV.1(Chronomètre FB 2TV.1)도 ‘다시 보고 싶은 시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메쥬르 뒤 떵 1787(Mesure du Temps 1787) 컬렉션의 시작을 알린 크로노미터 FB 2TV.1은 고급 시계에 대한 페르디낭 베르투의 열정을 대변한다. 시간과 자본에 개의치 않고 가용 자원을 모조리 투입해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페르디낭 베르투의 방식이다. 작년에 출시한 네상스 뒤느 몽트르 3는 페르디낭 베르투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크로노미터 FB 2TV.1도 별반 다르지 않다. 네상스 뒤느 몽트르 3에서 보여준 광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기계적 미학과 수공 예술의 측면에서 여전히 압도적이다.
운 좋게도 나는 한국에서 크로노미터 FB 2TV.1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크로노미터 FB 2TV.1는 역시나 강렬했다. 시계를 1도 모르는 문외한일지라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38만3천유로. 한화로 무려 6억7천만원이다. 세금을 붙이면 7억원이 넘는다. 페르디낭 베르투의 시계 중에서는 비싼 편에 속한다. 가격을 생각하면 이 시계는 멋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합당한 가격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다만, 크로노미터 FB 2TV.1에 흥미로운 요소가 차고 넘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크로노미터 FB 2TV.1은 페르디낭 베르투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시계 바늘을 11년전으로 되돌려보자. 페르디낭 베르투는 브랜드를 정식으로 론칭한 2015년부터 범상치 않았다. 팔각형 케이스, 독특한 레이아웃, 퓨제 앤 체인 같은 메커니즘은 두 눈을 의심하게 했다. 2016년에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대상인 애귀유 도르(Aiguille d’Or)를 수상한 것은 페르디낭 베르투의 참신함과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모종의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페르디낭 베르투의 시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크로노미터 FB 2RE(Chronomètre FB 2RE)다. 크로노미터의 원형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크로노미터 FB 2RE는 평범한 앞모습과는 달리 놀라운 비밀을 등 뒤에 숨겨 놓았다. 오래전에 사장되어 이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치들이 각자 한자리씩 꿰차고 있다. 헌데 이 귀한 것을 페르디낭 베르투는 감춰 놓았다. 시계를 벗어야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이 반전 매력을 좋아했지만 실구매자나 잠재 고객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계 제작의 최신 트렌드는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계적 미학을 시계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만끽하고 싶은 열망이 반영된 것이리라. 페르디낭 베르투는 이런 애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크로노미터 FB 2TV.1을 개발했다. 실제로 페르디낭 베르투는 전면을 통해 거의 모든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앞에서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기에 이전 제품에서 발견되는 케이스 측면의 글라스는 존재 가치를 잃고 사라졌다.
크로노미터 FB 2TV.1의 무브먼트는 2015년에 공개한 칼리버 FB-T.FC의 후속편에 속한다. 퓨제 앤 체인, 스톱워크, 투르비용,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라는 조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스톱 세컨즈와 플라이백 리셋 기능을 추가했다. 무브먼트는 1,24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777개가 체인을 만드는데 쓰였다. 마감에만 300시간을 소모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시계를 마주하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부품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마무리됐다.
퓨제 앤 체인은 에너지 전달 효율을 최대한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고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던 옛 시계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현대 시계 제작에서는 유명무실하다. 퓨제 앤 체인이 없어도 그만 혹은 있으면 안 될 정도로 시계 제조 기술은 저만치 발전해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지점에 크로노미터 FB 2TV.1의 가치가 담겨 있다. 불완전하고 불필요한 기술로 장인 정신과 독창성을 논하는 것이 오늘날 고급 시계의 문법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퓨제 앤 체인 같은 철 지난 메커니즘이 소구력을 가지는 게 아닐까 싶다.
퓨제에는 말테 크로스 스톱워크를 장착했다. 블랙 폴리싱한 말테 크로스 스톱워크의 역할은 토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계에서는 메인스프링의 유효 길이를, 퓨제 앤 체인이 있는 시계에서는 체인의 가동 범위를 제한한다. 이로써 전달되는 에너지를 최대한 일정하게 관리해 정밀함을 향상시킨다. 퓨제 앤 체인은 와인딩을 할 때 배럴이 체인을 잡아당겨 퓨제 콘을 회전시킨다. 문제는 기어트레인이 퓨제 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메인스프링을 감으면 퓨제 콘이 기어트레인의 회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퓨제 콘에 차동 기어를 통합했다. 덕분에 와인딩을 하는 도중에도 동력은 문제없이 기어에 전달된다. 퓨제 콘은 전통적인 퓨제 앤 체인 시스템과 달리 브리지 없이 메인 플레이트로만 지지한다. 플라잉 투르비용과 유사하다. 이 같은 구조는 무브먼트의 두께를 줄이며, 퓨제 앤 체인 메커니즘의 움직임을 보다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플라잉 투르비용은 세컨드 휠과 투르비용 케이지를 고정하는 하단 브리지 하나에 의지한 채 회전한다. 직경이 11.2mm에 달하는 밸런스 휠은 호쾌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밸런스 스프링의 수축과 팽창을 고려해 계단 형태로 가공한 3개의 스포크가 근사하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 필립스 터미널 커브를 적용한 밸런스 스프링은 수작업으로 성형했다.
리셋할 때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하고 미세한 진동을 제어하기 위해 필라멘트 구조의 티타늄으로 초침을 제작했다. 블루 CVD 및 샌드블라스트 처리한 초침의 길이는 무려 25.8mm나 된다.
이 시계에는 크로노미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기능이 있다. 첫 번째는 스톱 세컨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크라운을 뽑으면 초침이 그 자리에 선다. 덕분에 사용자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두 번째는 초침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제로 리셋이다. 시간을 맞춘 뒤 크라운을 제자리로 집어넣고 크라운에 삽입된 버튼을 누르면 초침이 원점으로 회귀해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을 맞추지 않더라도 버튼을 이용해 초침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다.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와 유사하다. 이 기능은 사용자가 조작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해준다. 버튼을 눌렀을 때의 감촉은 말 그대로 경쾌하다. 너무 무르지도, 너무 억세지도 않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도 예사롭지 않다. 배럴과 연결된 원뿔 모양의 부품이 나사처럼 가공한 축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보석을 부착한 모바일 암(Mobile arm)은 원뿔의 지름을 측정하고 이를 블루 CVD 처리한 바늘로 전달해 시각화한다.
화려한 앞모습에 비해 뒤에서 보는 무브먼트는 차분하다. 저먼 실버로 제작한 플레이트와 브리지는 로듐 도금한 황동 무브먼트와는 다른 감성과 분위기를 전달한다. 지름이 28mm에 달하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오프센터 다이얼과 크라운을 이어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설계 사상은 스타일이 아닌 기술적 제약에서 비롯했다. 퓨제 앤 체인 하단에 설치한 차동 장치를 회피하는 한편 간결한 방식으로 기어트레인을 정렬하기 위함이다.
윤리적으로 생산한 화이트 골드 케이스는 지름이 44mm, 두께가 15.46mm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페르디낭 베르투 시계가 대부분 그러한데 그 안에 담긴 기능을 감안하면 수긍할 수 있는 크기다. 케이스 디자인은 크로노미터 FB 2RE의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케이스 측면을 살짝 파낸 뒤 그 틈에 러그와 크라운 가드를 끼워 넣었다. 러그는 볼트로, 크라운 가드는 나사로 고정했다. 미들 케이스에 단차를 주어 입체감을 주는 일반적인 시계와는 다른데 페르디낭 베르투 시계의 복잡성을 잘 드러내는 요소로 느껴진다. 널링 가공한 크라운과 로고를 새긴 푸시 버튼을 보면 이 시계가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시계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했을 때 두툼하고 단단한 스트랩이 어울릴 듯하다. 색상은 바늘 때문인지 파란색과 궁합이 좋다. 시계가 너무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크로노미터 FB 2TV.1은 정밀함을 향한 탐구가 빚어낸 놀라운 결과물이다. 이 시계에는 독립 시계 제작의 정신과 고급 시계의 예술적 가치가 공존한다. 육중한 크기와 제한적인 수량 그리고 범접하기 어려운 가격은 커다란 장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매혹적인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파인 워치메이킹이 어디까지 발전하고 확장할 수 있을지 기대하게 만든다는 점이야말로 크로노미터 FB 2TV.1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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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름 :
- 4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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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께 :
- 15.46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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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
- 화이트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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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
- 사파이어 크리스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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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 :
-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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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랩 / 브레이슬릿 :
- 네이비 앨리게이터 악어가죽 스트랩, 화이트 골드 폴딩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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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얼 :
- 오픈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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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먼트 :
- 칼리버 FB-TV.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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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식 :
- 핸드와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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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 :
- 시, 분, 초, 플라잉 투르비용,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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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당 진동수 :
- 21,600vph(3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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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리저브 :
- 6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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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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