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완성되는 시계미학 2부: 하이엔드 수동 크로노그래프
수동 크로노그래프 3대장에 관한 이야기
- 이상우
- 2026.09.02
오늘날 기계식 시계 애호가들에게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성배와도 같다. 디자인이나 역사적인 스토리에 가치를 둘 수도 있겠으나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역시 무브먼트 자체의 비주얼이다. 제대로 만든 하이엔드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의 무브먼트는 기계식 시계 미학을 보여주는 정석과도 같다. 시계의 메인 동력과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이 정교한 부품으로 서로 연결된 모습은 사용자에게 시각적 만족감을 준다. 특히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로터로 가려지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무브먼트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런 장점은 다른 컴플리케이션과 비교하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흔히 기계식 시계의 대표적인 컴플리케이션으로 퍼페추얼 캘린더와 투르비용을 꼽는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복잡한 기능을 구현하지만 무브먼트 자체는 크게 볼거리가 없는 편이다. 캘린더를 제어하는 주요 메커니즘은 대부분 다이얼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통해 노출되는 무브먼트 뒷면은 일반적인 데이트 무브먼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투르비용 역시 회전하는 모습이 화려하긴 하지만 케이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임팩트가 강하지 않다. 물론 미닛 리피터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가격이나 실용성 측면에서 접근성에 한계가 있다.
결국 기능, 심미성, 역사성, 가격 등을 모두 고려할 때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역시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라고 하겠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수동 크로노그래프라고 해서 모두가 특별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무브먼트의 심미성을 확보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제품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현재 기계식 시계 시장에서 이 기준을 충족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찾는다면 파텍 필립의 5172G, 바쉐론 콘스탄틴의 히스토릭 콘 드 바슈 1955, 그리고 랑에 운트 죄네의 다토그래프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하이엔드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호명되는 3가지 시계이기도 하다.
1955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Ref. 6087을 선보였다. 지름 35mm에 스크루 케이스 백과 원형 푸셔를 갖춘 브랜드 최초의 방수 크로노그래프 워치였다. 내부에는 칼리버 492가 들어갔는데, 이는 발주 23을 기반으로 만든 컬럼 휠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이 시계가 콘 드 바슈(Cornes de Vache), 프랑스어로 소뿔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러그에 있다. 케이스에서 길게 뻗어 나온 러그의 끝이 뾰족하게 휘어져 내려가서 마치 ‘소뿔’처럼 보이는 것. 당시 이 러그는 손으로 만들어 케이스에 납땜해 붙였는데, 그래서 빈티지 모델들은 개체마다 형태가 미묘하게 다르다. 총 생산량은 36점으로, 옐로골드 26점, 핑크골드 8점, 플래티넘 2점(플래티넘은 소뿔 러그가 아니다)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Ref. 6087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은 1989년까지 34년 동안 크로노그래프를 제작하지 않았다.
2015년 9월, 바쉐론 콘스탄틴은 히스토릭 콘 드 바슈 1955를 공개했다. 지름은 1955년 오리지널 모델의 35mm에서 38.5mm로 커졌고 10.9mm 두께의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였다. 실버 오팔린 다이얼에 블루 페인트 타키미터 스케일을 갖췄으며, 서브 다이얼 2개의 바이컴팩스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메인 핸즈와 바 인덱스는 18K 골드 소재로 제작했고, 중앙의 크로노그래프 초침과 30분 카운터 핸즈에는 블루 컬러를 적용해 타키미터 스케일과 균형감을 맞췄다. 이후 2016년에는 핑크골드 모델이 출시되었고, 2019년에는 스틸 모델까지 합류했다.
히스토릭 컬렉션으로 출시된 콘 드 바슈 1955는 1950년대 빈티지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완벽하게 재현한 모델이다. 소뿔 형태의 러그는 시계에 고전적인 멋과 개성을 부여하며, 피스톤 형태의 푸셔와 크라운 역시 특별한 꾸밈을 더하지 않은 빈티지 감각 그대로다. 실버 오팔린 다이얼 외곽에 과거의 숫자 폰트로 프린팅된 타키미터 스케일도 역시 과거의 모습을 제대로 살렸다. 이 시계는 최신형 스포츠카를 타고 스피드를 즐기기 위한 스포츠 크로노그래프 워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살짝 빈티지한 자동차를 타고 오래된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드레스 크로노그래프 워치다. 정통 드레스 워치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살짝 삐딱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착용하면 제격이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언제든 소뿔로 들이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 다소 중앙에 집중된 듯한 크로노그래프 카운터 배치에서 무브먼트의 사이즈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레이아웃은 결국 타키미터 스케일 안쪽으로 배치된 작은 다이얼 공간과 짧은 바통 핸즈 디자인으로 연결된다. 시계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결국 무브먼트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콘 드 바슈에 탑재된 칼리버 1142의 베이스는 르마니아 2320이다. 2310 계열의 2카운터 버전으로, 굳이 따지자면 오메가 칼리버 321과 형제쯤 되는 무브먼트라고 할 수 있다. 이 르마니아 2310은 20세기 후반, 고전적 아키텍처의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만들고 싶은 브랜드에게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물론 과거의 무브먼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아키텍처만 가져 왔을 뿐 바쉐론 콘스탄틴 매뉴팩처에서 부품 생산부터 조립까지 자체 제작한 무브먼트다. 칼리버 1142는 기존에 사용하던 칼리버 1140이나 1141과 비교하면 여러 부분에서 진화가 이뤄졌다. 메종은 진동수를 시간당 18,000회에서 21,600회로 올렸고, 프리스프렁 밸런스를 적용했다. 또한 크로노그래프 레버와 스프링을 재설계하고, Y자형 크로노그래프 브리지의 형태도 좀 더 멋스럽게 바꿨다. 이렇게 만들어진 칼리버 1142는 총 164개 부품을 사용하며, 48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한다.
칼리버 1142는 여러 부품들을 드러낸 수동 크로노그래프 특유의 구조가 멋스러우며, 제네바 실을 받은 제품답게 마감 역시 훌륭하다. 각 부품은 장인들이 직접 수작업으로 마감하는데, 잘 연마된 표면 마감과 부드럽게 처리된 베벨링이 돋보인다. (오메가의 칼리버 321과 비교하면 마감의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컬럼 휠 중앙에 깨알 같이 말테 크로스 형상을 새겨 넣은 디테일도 주목할 부분이다. 20세기 초반에 활용하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현대적인 사양으로 복원하고, 여기에 하이엔드 수준의 피니싱까지 더한 무브먼트가 바로 칼리버 1142인 셈이다.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황금기를 주도했던 무브먼트를 높은 퀄리티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모델이라고 하겠다. 다만 한정판이나 스플릿 세컨즈 이외에 기본형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인하우스 버전이 없다는 건 브랜드 밸류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리치몬트 그룹의 바쉐론 콘스탄틴이 어떻게 스와치 그룹의 르마니아 무브먼트를 사용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업계의 다소 복잡한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989년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부활시키며 르마니아 2320 기반의 칼리버 1141을 사용했다. 르마니아는 피아제의 지원을 받으며 1981년 누벨 르마니아가 되었고, 1999년 스와치그룹이 브레게와 함께 사들이면서 외부에 에보슈를 팔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바쉐론 콘스탄틴이 르마니아 2320 기반의 칼리버 1142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로저 드뷔가 2000년대 중반에 르마니아 무브먼트 몇 종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해두었고, 이후 리치몬트가 로저 드뷔를 인수하면서 그 권리가 그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바쉐론 콘스탄틴은 이 무브먼트를 직접 만들게 되었다.
참고로 칼리버 1142가 처음 적용된 모델은 2015년 1월 창립 260주년 하모니 컬렉션에서 공개된 여성용 하모니 크로노그래프 스몰 모델이다. 그해 가을에 공개된 콘 드 바슈 1955는 칼리버 1142가 적용된 두 번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파텍 필립의 크로노그래프 워치 역사는 1930년대에 시작된다. Ref. 130, Ref. 533이 대표적이며 1940년대에는 파텍 최초의 방수 크로노그래프인 Ref. 1463이 출시되었다. Ref. 1463이 1965년 무렵 단종된 뒤, 파텍 필립은 30년 넘게 단순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만들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만 생산했는데, 아마도 고급 시계 브랜드로 완벽하게 차별화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쿼츠 위기를 지나 1998년, 파텍 필립은 Ref. 5070으로 단순 크로노그래프 워치에 복귀했다. 케이스 지름은 42mm였는데, 당시 칼라트라바가 지름 33~35mm 정도 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파격적인 사이즈였다. 내부에 탑재된 칼리버 CH 27-70은 르마니아 2310 기반의 무브먼트로, 이는 파텍 필립의 마지막 에보슈 기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이기도 했다.
2009년 11월, 티에리 스턴이 사장 취임 후 처음 주재한 대형 발표에서 파텍 필립은 칼리버 CH 29-535 PS를 공개했다. 현재 파텍 필립의 5172G에 탑재되는 단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2005년 파텍 필립 최초의 매뉴팩처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CHR 27-525 PS를 선보이긴 했으나 이는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였다) 개발에는 5년이 걸렸고, 처음 들어간 시계는 남성용이 아니라 여성용 Ref. 7071 ‘레이디스 퍼스트 크로노그래프’였다. CH 29-535 PS는 컬럼 휠에 수평 클러치를 갖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로 총 270개 부품에 시간당 28,800회 진동했고, 약 65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했다. 이 무브먼트에는 다음과 같은 6건의 신규 특허가 붙었다.
– 최적화된 톱니 프로파일: 크로노그래프 초침 떨림 방지, 기어 마찰 줄여 에너지 전달 효율 향상. 부품 마모 줄임.
– 컬럼 휠 캡(컬럼 휠 위에 있는 동그란 부품): 클러치 휠과 크로노그래프 휠이 맞물리는 깊이를 정교하고 빠르게 조정할 수 있음. 정비성과 작동 안정성 향상.
– 블로킹 레버와 클러치 레버 동기화(둘 사이에 별도 부품과 스프링 시스템 사용): 크로노그래프 초침 떨림 방지, 조정 단순화. 정밀도 향상.
– 리셋 해머 축에 주얼 사용: 메탈 핀이 아닌 주얼을 이용해 리셋 레버 움직일 때 발생하는 마찰 줄임. 부드러운 조작감, 정밀도 향상.
– 리셋 해머 셀프 세팅: 리셋할 때 해머가 초, 분을 완벽하게 제어. 오작동 방지. 정확한 리셋. 조립할 때 수작업으로 미세하게 작업해야 할 필요를 줄임.
– 미닛 카운터 캠에 슬롯과 스톱 메커니즘 추가: 크로노그래프 분침 즉각 점핑. 바늘이 애매하게 넘어가거나 오작동하는 것 방지.
즉 여섯 가지 특허 모두 ‘마찰과 튐과 떨림’에 관한 것이었으며, 새로운 기능을 더하기보다는 기존 동작의 안정성과 정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또한 밸런스 휠에는 무게추 방식의 자이로맥스가 적용되어 정교하게 오차를 제어할 수 있었다. 등장 시기로 보나, 기술적인 특성으로 보나 성능 면에서는 비교 대상인 세 무브먼트 중에서 가장 좋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무브먼트의 피니싱은 파텍 필립답게 훌륭한 수준이다. 베이스 플레이트의 페를라주를 기본으로, 부품별로 서로 다른 마감을 적용해 대비 효과를 주었고, 각 부품의 베벨링 역시 빠짐없이 들어 갔다. 브리지의 제네바 스트라이프 역시 하이엔드에 걸맞은 수준이다.
파텍 필립은 이 새로운 칼리버를 사용해 2010년 지름 39.4mm 케이스의 크로노그래프 워치 Ref. 5170을 선보였다.
현행 크로노그래프 모델인 Ref. 5172G는 Ref. 5170의 후속 모델로 2019년 바젤월드에서 등장했다. 지름 41mm에 두께는 11.45mm였고, 독특한 ‘3단 러그(three-tier lugs)’를 갖춘 단순 크로노그래프 워치다. 여기에 박스형 사파이어 크리스털, 무광 블루 래커 다이얼, 화이트골드 아플리케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시린지(주사기) 핸즈를 적용했고, 외곽에는 타키미터 스케일. 그리고 과거 Ref. 1463에 대한 오마주인 기요셰 원형 피스톤 푸셔를 더했다.
41mm의 케이스는 42mm의 Ref. 5070과 39.4mm의 Ref. 5170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이지만 출시 당시에는 사이즈가 다소 크다는 의견이 많았다. 자사의 빈티지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계승하되, 조금 더 현대적인 사이즈와 디자인 변주를 가미한 구성이다. 현재 파텍 필립이 보여주고 있는 다소 젊은 감각의 ‘네오 빈티지’ 감각이 느껴지는 모델이다. 외모나 무브먼트에서 고전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느낌이 있지만 바쉐론 콘스탄틴의 콘 드 바슈 1955보다는 확실히 튀는 느낌이다. 사이즈가 크고 기본 다이얼 컬러가 블루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2022년에는 로즈길트 오팔린 다이얼의 Ref. 5172G-010까지 더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수동 크로노그래프라는 성격에는 오히려 이 새먼 컬러 다이얼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이 20세기 후반까지 르마니아 2310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랑에 운트 죄네는 처음부터 아예 새로운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제작했다. 이는 브랜드 설립 당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990년 12월 7일, 발터 랑에(Walter Lange)가 글라슈테에서 ‘랑에 우렌 유한회사(Lange Uhren GmbH)’를 등록한다. 그의 증조부 페르디난트 아돌프 랑에가 1845년 12월 7일에 회사를 세웠으니, 정확히 145년째 되는 날에 브랜드가 부활한 것이다. 랑에 운트 죄네의 재건을 도운 사람은 귄터 블륌라인(Günter Blümlein)이었다. 당시 IWC 샤프하우젠의 CEO이자 예거 르쿨트르의 경영을 맡고 있던 인물로, 그는 이 두 브랜드에 랑에 운트 죄네를 더해 LMH(Les Manufactures Horlogères)를 결성했다. 발터 랑에는 이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우리에게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만들어 팔 시계도 없었고, 직원도, 건물도, 기계도 없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글라슈테에서 세계 최고의 시계를 다시 만들겠다는 비전뿐이었다.”
이러한 비전 아래 4년을 준비한 끝에 1994년 10월 24일, 드레스덴 왕궁에서 랑에 운트 죄네의 첫 컬렉션이 공개되었다. 랑에 1, 삭소니아, 아르카데, 그리고 퓨제-체인 장치를 손목시계에 처음 담아낸 투르비용 워치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였다. 기술도 설비도 없이 출발한 브랜드가 4년 만에 엄청난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다토그래프는 최고의 시계를 만들겠다는 랑에 운트 죄네의 예정된 미래였고,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크로노그래프를 만들자고 밀어붙인 것은 귄터 블륌라인이었다. 크로노그래프 워치가 하이엔드 브랜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립 이후 5년 뒤 1999년 바젤 페어에서 랑에 운트 죄네는 첫 번째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발표했다. 플래티넘 케이스의 다토그래프 Ref. 403.035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계는 현대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의 부활을 알린 상징적인 모델이다.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었지만 기계식 시계 업계는 여전히 쿼츠 위기의 충격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기계식 무브먼트는 대거 사라졌고, 크로노그래프의 선택지는 발주 7750과 르마니아 2310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파텍 필립조차 바로 전 1998년 Ref. 5070에 르마니아 기반의 칼리버 CH 27-70을 얹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건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독일 브랜드가, 플라이백, 점핑 분 카운터,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한꺼번에 갖춘 완전히 새로운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이 새로운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에 많은 애호가들이 열광했다. 당시 필립스 경매의 표현을 빌리면, 다토그래프는 “아직 랑에 운트 죄네를 몰랐던 모든 사람들이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었다”.
케이스는 직경 39mm에 두께 12.8mm의 원형 케이스다. 1994년 최초 스케치에서는 토노 형태였다가 나중에 원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다이얼은 솔리드 실버를 블랙 컬러로 마감했고, 두 개의 서브다이얼이 밝은 은색으로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이 서브다이얼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 통상적인 3시와 9시 축에 놓이지 않고 살짝 아래로 내려앉아 사실상 4시와 8시 방향에 자리한다.
랑에 운트 죄네가 이런 레이아웃을 적용한 이유는 1차적으로 조형적인 미학 때문이다. 12시 방향의 아웃사이즈 데이트와 두 서브다이얼의 중심이 3개의 꼭지점으로 완벽한 정삼각형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인덱스도 같은 맥락에서 디자인했다. 아플리케 로마 숫자는 II, VI, X 셋뿐이고 나머지는 바 인덱스인데, 이 3개의 로마 숫자가 또 하나의 정삼각형(역삼각형)을 만든다. 하지만 이 기하학적인 레이아웃은 어느 정도 강제된 측면도 있다. 12시 방향에 커다란 날짜 창으로 인해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이 자연스럽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이 배치 때문에 랑에 운트 죄네는 부품을 평면에 펼치는 통상적인 방식 대신 층층이 쌓아 올리는, 보다 입체적인 설계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다토그래프의 무브먼트를 실제로 봤을 때 일반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와 다르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다.
12시 방향의 아웃사이즈 데이트와 두 서브다이얼의 중심이 3개의 꼭지점으로 완벽한 정삼각형을 이루며, 3개의 로마 숫자(II, VI, X)가 또 하나의 정삼각형(역삼각형)을 만든다.
핸즈는 로듐 도금한 골드 소재이며, 다이얼 외곽에는 한 단 높인 플랜지 위로 타키미터 스케일이 프린팅되어 있다. 브랜드명 또한 이 플랜지 부품 12시 방향에 부채꼴 형태로 넣어서 시계에 독특한 인상을 더한다. 플랜지 아래 다이얼 외곽에는 1/5초 단위로 눈금을 나눈 트랙이 있다. 시간당 18,000회 진동, 즉 초당 다섯 번 진동하는 무브먼트에 맞춘 것으로,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정확히 1/5초 단위로 전진한다. 1세대에서는 서브다이얼이 이 트랙을 파고들어 인덱스 일부가 잘려 있었으나 2012년 다토그래프 업/다운 모델에서는 공간에 여유가 생기면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12시 방향의 아웃사이즈 데이트는 브랜드의 헤리티지가 반영된 랑에 운트 죄네의 시그니처다. 이 큼직한 날짜창의 역사는 1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 12일,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하우스가 개관했는데, 무대 위쪽에는 커다란 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F.A. 랑에의 스승이자 궁정시계사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굿카에스(Johann Christian Friedrich Gutkaes)가 만든 5분 시계(Fünf-Minuten-Uhr)다. 이 거대한 시계에는 직물로 감싼 지름 160cm 드럼 두 개에 숫자가 인쇄되어 있고, 그것이 회전하면서 프레임의 두 창으로 숫자를 드러냈다. 숫자 하나의 높이가 40cm 정도라서 극장 맨 뒷줄에서도 시간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랑에 운트 죄네는 이 드레스덴 오페라하우스 시계의 역사와 가독성을 손목시계로 가져왔다. 1992년 이 구조로 특허를 냈고, 1994년 랑에 1에서 아웃사이즈 데이트 기능을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랑에 운트 죄네의 아웃사이즈 데이트는 두 장의 디스크가 겹쳐 돌며 큰 숫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손목시계에 빅데이트 문법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토그래프의 아름다움은 시계 뒷면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이미지가 아닌 실물을 직접 보면 정교한 부품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내는 입체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현존하는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중에서 미학적인 성취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법한 무브먼트다. 1세대 다토그래프에 탑재된 칼리버 L951.1은 405개 부품에 40석을 사용하는데, 그중 4개는 나사로 고정한 골드 샤통에 얹혔다. 시간당 18,000회 진동해 36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했고, 플라이백 기능, 점핑 분 카운터, 그리고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아웃사이즈 데이트까지 탑재해 당시 일반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보다 향상된 기능을 보여줬다.
플라이백은 정지와 복귀와 재시작을 한 번의 조작으로 압축한다. 작동 중 해머를 하트캠에 떨어뜨릴 수 있도록 레버 배치를 다시 짠 구조로, 갈고리 모양의 플라이백 레버가 별도로 들어간다. 점핑 분 카운터 역시 매우 정확하게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분 단위로 점핑하는 미닛 카운터의 경우, 전환 프로세스에 1~2초 정도가 소요되는데, 미닛 카운터가 작동시 지연되어 시계가 1분가량 멈추게 되면, 카운터 핸즈가 이미 앞으로 이동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된다. 랑에 운트 죄네의 점핑 분 카운터는 시간 측정이 멈춘 그 수간에도 정확히 60초가 경과한 후 한 개의 눈금만큼만 이동한다. 랑에 운트 죄네의 엔지니어들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 메커니즘을 개선했고, 특허받은 스위칭 레버를 통해 무브먼트를 분해하지 않고도 미닛 카운터 점프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다토그래프 무브먼트에는 유난히 길게 뻗은 레버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특수한 다이얼 배치 때문이다. 레버들은 아웃사이즈 데이트 메커니즘을 우회하면서 중심선 아래에 위치한 서브다이얼을 제어한다. 결국 커다란 날짜 창이 다이얼 앞면의 정삼각형을 만드는 동시에, 뒷면의 아름다운 곡선도 함께 만들어내는 셈이다.
크로노그래프의 조작감은 다른 크로노그래프에 비해 가볍고 부드러운 편이다. 실제로 일본의 시계 칼럼니스트 히로타 마사유키가 다토그래프 업/다운의 푸시버튼 토크를 실측한 결과 스타트 시 약 590g, 리셋 시 약 712g으로 측정되었다. 발주 7750의 절반 수준으로, 그는 푸시버튼을 고정하는 스프링을 약하게 만들어 극히 가볍고 정밀한 감촉을 얻었다고 설명한다.
1세대 다토그래프는 2011년까지 생산되었는데, 특히 2003~2005년 사이에 생산된 핑크 골드 케이스에 블랙 다이얼 버전인 Ref. 403.031은 일명 ‘듀포그래프’라고 불린다. 독립시계 제작자 필립 듀포가 구입한 시계로 유명해진 모델이다. 그는 다토그래프의 칼리버 L951.1에 대해서 “역사상 만들어진 최고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라고 극찬했고, 실제로 핑크골드 모델을 구입해 소장했다고 전해진다.
2012년 등장한 다토그래프 업/다운은 1세대 다토그래프에서 보다 진화한 모델로, 6시 방향에 작은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추가된 것이 특징이다. 케이스는 41mm, 두께는 13.1mm로 조금 더 커졌고, 날짜창도 살짝 넓어졌다. 덕분에 다이얼 공간에서도 꽤 여유가 느껴진다. 다이얼에는 로마 숫자가 사라지고 모두 바 인덱스가 되었으며, 서브다이얼에 잘려 나갔던 미닛 트랙도 넓어진 공간 덕분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무브먼트는 칼리버 L951.6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부품수가 405개에서 451개로 늘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파워리저브다. 배럴에 있던 제네바 스톱 워크를 없애 배럴을 키우고 메인스프링을 다시 설계해 파워리저브를 36시간에서 60시간으로 늘렸다. 또한 프리스프렁 밸런스와 자사 제작 헤어스프링을 채택했으며, 파워리저브 표시 기능도 추가되었다.
다토그래프 업/다운은 현재 3가지 소재(플래티넘, 핑크 골드, 화이트 골드)로 만나볼 수 있으며, 화이트 골드 모델의 경우 실버 소재의 블루 다이얼이 적용된 125개 한정판이다.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의 장점 중 하나는 무브먼트 복잡한 구조를 감상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파텍 필립의 CH 29-535 PS나 바쉐론 콘스탄틴의 칼리버 1142도 하이엔드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로서 좋은 피니싱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브먼트 구조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랑에 운트 죄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무브먼트 피니싱은 현재 메이저 브랜드 중에서도 최정상급인데, 특히 다토그래프는 무브먼트 구조가 복잡해서 더욱 피니싱의 가치가 높다.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감을 수많은 부품에 빠짐없이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하이엔드의 자격이 충분하다. 이번 리뷰에서는 1세대 다토그래프에 탑재되었던 칼리버 L951.1을 교보재 삼아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사용자 개입은 무브먼트의 미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무브먼트의 미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부분의 무브먼트에서 백케이스 너머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은 밸런스의 진동과 배럴의 아주 느린 회전(이건 사실상 인간이 감지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어 몇 개가 전부다. 퍼페추얼 캘린더나 투르비용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크로노그래프는 다르다. 푸셔를 누르면 컬럼 휠이 한 칸 돌고, 그 위에 얹힌 레버가 이동한다. 클러치가 붙고 브레이크가 풀리고 해머가 움직인다. 푸셔를 다시 누르면 부품들이 반대 순서로 작동하고, 리셋 푸셔를 누르면 해머가 하트캠을 때리면서 모든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린다. 즉 크로노그래프는 사용자의 조작이 곧 기계의 가시적 상태 변화를 일으키는 거의 유일한 컴플리케이션이다. 물론 당신이 푸셔를 누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컴플리케이션이 관객에게 완성된 정경을 보여준다면, 크로노그래프는 관객이 연출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어쩌면 푸셔를 누르는 당신이 시계의 컴플리케이션을 완성하는 마지막 장인일지도 모른다.
다토그래프의 칼리버 L951.1은 이 모든 개입과 변화의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무브먼트다. 시계의 메인 무대인 다이얼에서는 여느 크로노그래프와 동일한 움직임을 보여주겠지만 사실 무대 뒤편에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 무대의 뒤편을 언제든 일상의 객석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토그래프라는 공연 티켓의 진짜 가치다. 그러면 무대 뒤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배우와 소품들이 활약하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칼리버 L951.1은 메인 플레이트 위에 각 브리지를 입체적으로 쌓아올린 구조다. 그래서 마치 마야의 고대 도시처럼 높낮이가 느껴진다. 다토그래프의 뒷면이 건축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층이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얼 쪽 메인 플레이트 위에 쓰리쿼터(3/4) 플레이트가 얹히고, 그 위에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이 다시 한 층을 이룬다. 랑에 운트 죄네의 시그니처 중 하나인 3/4 플레이트는 무브먼트 면적의 4분의 3을 덮는 거대한 브리지 부품으로, 기어트레인 전체를 고정하고 밸런스만 드러낸다. 구조적으로는 기어트레인의 모든 축 베어링이 하나의 고정된 평면에 잡히기 때문에 맞물림이 안정되고 조립이 빨라진다. 타임 온리 무브먼트에서는 판 전체가 보이는 것과 달리, 다토그래프에서는 그 위에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이 한 층 더 얹힌다. 3/4 플레이트가 다음 층을 받치는 바닥이 되는 것.
메인 플레이트의 컬러도 차별화되는 요소다. 다토그래프의 메인 플레이트는 저먼 실버로 제작된다. 이름과 달리 은이 함유된 것은 아니다. 저먼 실버는 구리와 니켈과 아연의 합금으로, 대부분의 스위스 브랜드가 황동 소재의 메인 플레이트에 로듐 도금하는 것과 달리 랑에 운트 죄네는 도금하지 않은 저먼 실버 소재를 사용한다. 니켈이 은빛 색조와 내식성을 함께 제공하기 때문에 굳이 도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때문에 표면이 극도로 민감하며, 시간이 지나면 아주 옅게 색이 변하기도 한다. 일종의 파티나 현상인데, 일부 컬렉터들은 이런 특성 때문에 저먼 실버를 선호하기도 한다.
밸런스 콕의 각인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밸런스를 덮는 작은 판 하나에 손으로 문양을 새기는데, 중앙 나사를 둘러싼 꽃잎과, 부품의 윤곽선을 밑그림 없이 프리핸드 방식으로 새긴다. 칼리버 스완넥 레귤레이터의 경우, 과거 칼리버 L951.1에서는 오차를 미세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칼리버 L951.1은 프리스프렁 방식이 아니라서 인덱스 핀이 있었고, 스완넥 레귤레이터가 이 인덱스 핀을 이동시켜 오차를 미세 조정할 수 있었다. 이후 칼리버 L.951.6에서는 프리스프렁 방식으로 바뀌면서 인덱스 핀이 사라졌고, 스완넥 레귤레이터 역시 비트 에러를 조정하는 것으로 역할이 변경되었다. 실질적인 오차 조정은 거의 밸런스 웨이트로 이뤄지기 때문에 기능보다는 미학적인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토그래프에는 블루 나사로 고정한 골드 샤통 4개가 있다. 루비를 골드 링에 물린 뒤 그 링을 메인 플레이트에 나사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각 샤통마다 블루 스크루 세 개가 붙는다. 홀 스톤 세팅의 정밀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진 오늘날에는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통을 계승하고 시각적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랑에 운트 죄네는 이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무엇보다 금색 링과 붉은 루비, 그리고 파란 나사가 만드는 색채의 대비가 무브먼트에 화려함을 더해준다.
크로노그래프 레버를 비롯한 일부 스틸 부품에는 거울처럼 광을 내는 미러 폴리싱 기법을 적용했다. 부품을 엘더베리 코어 안으로 밀어 넣고 매우 미세한 다이아몬드 파우더로 코팅된 필름 위에서 8자형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플랫 폴리싱 처리를 완성한다. 부품과 폴리싱 필름 사이에 아주 작은 먼지가 있거나 부품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는 경우 수 시간 동안 공들인 결과물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의 무브먼트는 부품 하나하나의 마감이 뛰어나지만 하나로 모였을 때는 다소 평범한 느낌이 있다. 반면 칼리버 L951.1에서는 보다 입체적인 구조와 다채로운 컬러를 느낄 수 있다. 3/4 플레이트의 상층에서는 데이트 기구를 우회하며 길게 뻗은 레버들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컬럼 휠과 각종 나사 부품들이 건축물을 고정하는 리벳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저먼 실버의 따뜻한 회백색과 강철의 차가운 광택이 각각의 층을 뚜렷하게 구분하며, 모든 부품들의 베벨링이 각 층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루비의 레드, 골드 샤통의 금빛, 블루 스크루의 파란빛이 컬러감을 더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지름 30.6mm의 미시 세계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객석에서 보는 것은 이런 여러 요소들이 정교하게 기획·배열된 일종의 마이크로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야기꾼이 사라지는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도예가의 손자국이 그릇에 남듯 이야기꾼의 흔적이 이야기에 남는다고 썼다. 이야기꾼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을 경험에서 길어 올린다. 자기 경험이든 전해들은 것이든.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들의 경험으로 다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흔적이 남는 이유는 특별히 정성을 더 들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예견한 것처럼 오늘날 이야기꾼은 거의 사라졌다. 이야기는 다양한 매체로 가공되어 빠르게 소비되고 그보다 더 빠르게 폐기된다. 물건이 대량 생산되듯이 이야기도 대량 생산되어 소비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기계식 시계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이야기꾼일지도 모른다. 차가운 기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시계 애호가들이 자신의 시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유다) 그래서 시계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보이는 흔적이든 보이지 않는 흔적이든. 도예가의 손자국이 그릇에 남듯이. 서서히.
사용자가 개입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그 흔적을 더욱 선명하게 남길 수 있다. 매일 감아온 크라운은 미세하게 닳고, 자주 누른 푸셔는 조금 부드러워진다.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이야기꾼은 많은 것들을 손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시계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착용자를 기억하게 된다.
김춘수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시를 끝내지 않았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썼다. 푸셔를 누르는 일도 다르지 않다. 내가 눌러야 비로소 시계가 되지만, 오래 누르다 보면 시계도 나를 기억한다.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감고, 누르고, 되돌리는 그 사소한 ‘귀차니즘’의 정체는 어쩌면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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