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목시계의 세계로 떠나는 여정의 길목에는 언제나 까르띠에 산토스(Cartier Santos)가 서 있다. 최초의 현대 손목시계라는 수식어를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디자인과 시대정신을 담아낸 아이콘, 산토스의 탄생과 궤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미학에 대해 알아보자.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1897년 기구 비행을 시작으로 비행기 제작과 항공 산업 발전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수많은 시도 끝에 1901년 최초로 에펠탑 주위를 비행하는데 성공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Cartier Archives © Cartier
1904년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가 그의 친구이자 브라질 출신의 비행사였던 알베르토 산토스-뒤몽(Alberto Santos-Dumont)을 위해 제작한 시계. 산토스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너머에 자리하는 시대적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은 손목시계와 항공 산업의 여명기였다. 시계 산업은 여전히 회중시계가 주도했고, 항공 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산토스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비행 중 조종간을 놓지 않고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던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의 욕망은 손목시계라는 새로운 형태의 탄생을 이끌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능적인 해결책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역동성,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 디자인 철학 그리고 20세기 초를 풍미한 아르데코(Art Deco) 사조가 우아하게 발현된 일대 사건이었다. 에펠탑의 기하학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루이 까르띠에는 정사각형 케이스를 채택했다. 시계는 원형이어야 한다는 보편적 명제를 거부한 도발적인 선택이었다. 케이스에 스트랩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러그는 별개의 부품에서 케이스의 일부로 치환했다. 베젤에서 리벳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킨 디자인 역시 기능적 요소를 미학의 중심으로 끌고 온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기술에 대한 환영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 장치였다.
파리 사교계의 유명인사이자 모험가였던 알베르토-산토스 뒤몽이 손목에 시계를 착용하고 등장하자 사람들은 곧바로 이 신문물에 관심을 내비쳤다. 하지만 루이 까르띠에가 산토스를 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11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선택 받은 일부 고객만이 산토스를 가질 수 있었다. 루이 까르띠에는 파리 왕립 해군에게 크로노미터를 납품했던 프랑스의 시계 제작자 에드몬드 예거(Edmond Jaeger)로부터 무브먼트를 공급받았다. 당대 최고의 무브먼트 제작자 중 하나였던 에드몬드 예거와의 협업은 당시에는 다소 생소했던 손목시계에 기술적 신뢰성을 부여해 대중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까르띠에의 드높은 명성에 어울리는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루이 까르띠에의 야망을 보여준다.
소수의 고객을 위한 주문 제작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산토스는 1978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산토스의 재등장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는 까르띠에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자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 까르띠에는 런던, 파리, 뉴욕 법인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각각의 법인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제품을 생산했다. 1972년 로버트 호크(Robert Hocq)와 조셉 카누이(Joseph Kanoui)를 필두로 한 투자자 그룹이 까르띠에 파리를 인수했고, 1974년과 1976년에는 까르띠에 런던과 까르띠에 뉴욕까지 매입하며 메종을 하나로 묶었다. 까르띠에 통합이 한창이던 와중에 두 사람은 알랭 도미니크 패랭(Alain Dominique Perrin)을 앞세워 까르띠에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머스트 드 까르띠에(Les Must de Cartier)다. 까르띠에는 머스트 드 까르띠에 컬렉션을 통해 비교적 낮은 가격대의 제품을 선보이며 귀족과 상류층만을 위한 폐쇄적인 브랜드에서 중산층과 젊은 고객을 겨냥한 럭셔리 브랜드로 이미지를 쇄신했다. 이는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가 초래한 경기 침체에 맞서 생존을 도모한 까르띠에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머스트 드 까르띠에 탱크가 시장을 강타한지 불과 1년 뒤인 1978년에 까르띠에는 산토스를 소환했다. 쿼츠 시계의 등장으로 기계식 시계 산업이 위기를 맞이하고, 럭셔리 스포츠 워치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던 시기에 까르띠에는 산토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거친 탁류에 몸을 맡겼다. 까레(Carrée)라고도 불리는 산토스 드 까르띠에(Santos de Cartier)는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에 골드 베젤과 나사를 조합한 소위 콤비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고급 시계는 귀금속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실용성과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소비자를 겨냥한 고급 시계가 속속 등장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해졌다. 까르띠에는 케이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브레이슬릿과 전면에 노출한 나사를 이용해 산토스만의 독보적인 디자인 언어를 완성했다. 이로써 산토스는 최초의 현대 손목시계이자 파일럿 워치를 넘어 일상과 레저를 아우르는 아이코닉 워치로 진화했다.
1987년에 데뷔한 산토스 갈베(Santos Galbée)는 산토스 컬렉션에 불어 닥친 또 한 번의 중대한 변화였다. 프랑스어로 곡선을 의미하는 갈베라는 이름처럼 산토스 갈베는 케이스 디자인을 손목을 감싸는 유선형으로 바꿔 착용감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추가로 모서리를 부드럽게 다듬고 브레이슬릿의 링크를 둥글게 만들었다. 직선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산토스에 우아한 곡선을 더한 산토스 갈베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영역에서 까르띠에가 이룩한 눈부신 발전이었다. 산토스 갈베는 성별과 크기에 따라 다양한 모델로 출시됐다. 대부분의 산토스 갈베는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했지만, 기계식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스위스 시계 업계는 쿼츠 시계의 파고를 힘겹게 넘고 있었다.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고객들이 조금씩 증가하자 까르띠에는 기계식 무브먼트의 비중을 늘려갔다. 2005년에는 커다란 시계를 원하는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덩치를 불린 산토스 갈베 XL을 출시했다. 특유의 절묘한 비율과 현대적인 세련미를 겸비한 산토스 갈베 XL은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대응할 수 있는 시계로 인기를 끌었다.
까르띠에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약 10년간 메종의 뿌리 깊은 유산과 정교한 기술력을 결합한 CPCP(Collection Privée Cartier Paris) 컬렉션을 전개했다. 까르띠에는 CPCP 컬렉션을 통해 헤리티지와 기술력을 재조명하고, 디자인에 치우친 브랜드라는 세간의 인식을 뒤바꾸려 했다. CPCP 컬렉션에서 다양한 시계가 등장했지만 산토스-뒤몽은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만하다. 산토스-뒤몽 CPCP(Santos-Dumont CPCP)에는 파인 워치메이킹의 양식을 빌려 산토스-뒤몽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고자 했던 까르띠에의 의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산토스-뒤몽 CPCP는 오리지널 모델의 간결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현대 고급 시계의 기준에 부합하는 마감과 기술력을 담아냈다. 모든 산토스-뒤몽 CPCP의 케이스는 골드나 플래티넘 같은 귀금속으로 제작했으며, 칼리버 021 MC나 칼리버 9780 MC처럼 얇은 핸드와인딩 무브먼트를 사용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내적 완성도까지 추구했던 CPCP 컬렉션의 철학을 보여준다. CPCP 컬렉션은 오늘날 프리베 컬렉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까르띠에가 아직까지 프리베 컬렉션에서 산토스를 다룬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까르띠에 프리베 산토스를 볼 수 있을지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04년 산토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시한 산토스 100(Santos 100)은 그 이름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2000년대 초반의 오버 사이즈 워치 트렌드를 선도했던 산토스 100은 커다란 케이스, 남성적인 실루엣, 두툼한 베젤, 볼드한 로마 숫자 인덱스를 앞세워 강인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로써 산토스 100은 차분함과 역동성의 중용을 추구했던 이전까지의 산토스와는 다르게 단순하고 견고한 아이코닉 워치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뛰어난 가독성의 근간인 두꺼운 검형 바늘에는 야광 도료를 칠했고, 크로노그래프처럼 남성들이 선호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러버 스트랩이나 블랙 PVD 및 블랙 ADLC 코팅 처한 올 블랙 스타일도 산토스 100을 통해 첫 선을 보였다.
무엇보다 산토스 100은 까르띠에가 자랑하는 스켈레톤 워치의 토대를 마련한 시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시계 제조사가 기존에 있던 무브먼트의 부품을 최대한 깎아낸 뒤 정교하게 마감하고 장식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머무를 때 까르띠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법을 제시했다. 까르띠에는 그저 무브먼트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브먼트를 조각하여 시계 디자인의 일부로 종속시켰다. 워치메이커가 아닌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비롯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까르띠에가 경쟁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2009년에 출시한 산토스 100 스켈레톤의 가장 큰 의의는 형태가 있는 무브먼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산토스 100 스켈레톤에 탑재한 칼리버 9611 MC의 메인 플레이트와 브리지는 까르띠에 시계 디자인의 요체인 로마 숫자의 형태로 가공해 다이얼로도 기능한다. 무브먼트가 곧 다이얼이고, 다이얼이 곧 무브먼트인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이후 탱크, 파샤, 크래시 등 다른 컬렉션으로 퍼져 나간 스켈레톤은 메종의 핵심 자산으로 편입됐다. 한편, 까르띠에 파인 워치메이킹 컬렉션을 출범시킨 까르띠에는 산토스 100 플라잉 투르비용 같은 시계를 선보이며 색다른 시도를 이어갔다.

스트랩을 간단하게 교체할 수 있는 퀵스위치 시스템과 별도의 도구 없이 브레이슬릿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링크 시스템을 산토스 드 까르띠에를 통해 처음 소개했다. © Cartier
까르띠에는 2018년 새로운 산토스 드 까르띠에(Santos de Cartier)를 선보였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는 과거의 유산을 복각하는 것을 넘어 시대적 흐름과 소비자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시계다. 베젤 위아래를 브레이슬릿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디자인의 일체감을 높였고, 사용자 편의성을 극대화한 퀵스위치(QuickSwitch) 및 스마트링크(SmartLink) 시스템을 적용했다. 소재, 크기(미디엄과 라지), 색상 별로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출시해 선택의 폭을 넓힌 것도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내부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범용 무브먼트를 인하우스 칼리버 1847 MC로 교체한 것이다. 칼리버 1847 MC에는 항자성을 가진 니켈-인 합금 부품을 투입해 기계식 시계에게 위협적인 자성의 영향력을 최소화했다. 자성의 숲에 살고 있는 현대인을 위한 배려이자 소비자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새로워진 산토스-뒤몽. 베젤을 장식하던 리벳을 나사로 바꿨다. 돔형 사파이어 카보숑을 세팅한 뾰족한 크라운, 완전한 정사각형 베젤, 얇고 긴 로마 숫자 인덱스 등 산토스 드 까르띠에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Cartier

2019년에 출시한 산토스 드 까르띠에 크로노그래프 워치. 케이스 왼쪽에 있는 푸시 버튼이 크로노그래프 스타트 / 스톱을 관장한다. 3시 방향의 크라운을 누르면 리셋이 된다. © Cartier

산토스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산토스 드 까르띠에 스켈레톤 워치. ADLC 코팅 처리한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과 슈퍼루미노바를 칠한 스켈레톤 무브먼트를 조합했다. Vincent Wulveryck © Cartier
이듬해인 2019년 까르띠에는 산토스 드 까르띠에와 함께 산토스 컬렉션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 산토스-뒤몽(Santos-Dumont)을 되살렸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가 브레이슬릿으로 스포티한 이미지를 강조한 반면 가죽 스트랩을 매칭한 산토스-뒤몽은 오리지널 산토스의 우아함과 고전미에 주목했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가 캐주얼이라면 산토스-뒤몽은 테일러드 수트에 비유할 수 있다. 둘의 차이는 베젤 및 크라운의 형태나 크라운 가드의 유무 같은 외관 뿐만 아니라 방수 성능 같은 기능적 요인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산토스 까르띠에의 방수 성능은 100m인데 반해 산토스-뒤몽은 30m에 그친다. 물론 산토스-뒤몽은 방수 성능을 포기한 대신 얇은 두께와 우수한 착용감 그리고 부드러운 맵시를 챙겼다. 얇은 베젤에 리벳 대신 나사를 박은 형태로 바뀐 새로운 산토스-뒤몽은 스몰, 라지, 엑스트라 라지로 크기가 나뉜다. 스몰과 라지 모델에는 배터리 수명이 6년인 쿼츠 무브먼트가, 엑스트라 라지에는 두께가 2.1mm에 불과한 핸드와인딩 칼리버 430 MC가 들어간다. 2년에 걸쳐 산토스 드 까르띠에와 산토스-뒤몽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세우며 산토스의 재정비를 마친 까르띠에는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쏟아냈다. 올해에는 산토스 드 까르띠에의 스몰 모델을 출시하며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췄다. 메종의 다른 컬렉션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다양한 시도와 아이디어가 산토스를 통해 현실화됐다. 이는 산토스의 입체적인 성격과 높은 확장성이 까르띠에의 여러 아이코닉 컬렉션 가운데에서도 발군이기에 가능했다.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산토스-뒤몽 XL 워치 리미티드 에디션. 케이스백에는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이 제작하고 탑승했던 비행기구(르 브레질, 라 발라되즈, 14 bis)를 각인했다. © Cartier

산토스-뒤몽 스켈레톤 마이크로 로터 워치. 옐로우 골드 모델만 래커 인레이 장식을 넣었다.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이 설계한 드모아젤(Demoiselle) 비행선 조각으로 마이크로 로터를 장식했다. © Cartier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변화를 꾀한 산토스 드 까르띠에 듀얼 타임 워치. 6시 방향의 인디케이터를 통해 듀얼 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위로 보이는 작은 창은 낮/밤 인디케이터다. © Cartier

다이얼의 인덱스를 거꾸로 배치한 산토스-뒤몽 리와인드 워치. 바늘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핸드와인딩 칼리버 230 MC를 탑재했다. 케이스백에는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의 서명을 새겼다. 플래티넘 케이스. 200개 한정. © Cartier
산토스는 단순한 손목시계가 아니다. 산토스는 손목시계의 역사 그 자체이자 시대의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발전해 온 혁신의 산물이다. 평범한 원형 대신 사각형이라는 이단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산토스가 대중의 품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비결은 형태를 해석하는 비범한 능력과 다양한 가치를 절묘하게 녹여내는 메종의 탁월한 심미안 때문이다. 현대 손목시계이자 파일럿 워치로 시작해 스포티한 고급 시계를 거쳐 아름다운 디자인과 사용자를 위한 편의성이 공존하는 아이코닉 워치로 진화한 산토스. 이 끝없는 변주야말로 산토스를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신화로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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