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정확한 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기계식 시계라도 하루에 몇 초 정도의 오차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확한 시간이야말로 시계의 품질이자 기술력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COSC나 마스터크로노미터 인증을 신앙처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은 일오차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자. 완벽하게 정확한 시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오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사실은 ‘완전한 세계의 불완전한 모방(Mimesis)’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본이 되는 완전한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이데아는 영원하고 완벽하며 이성으로 인식되는 세계다. 반면 현실 세계는 변화하고 불완전하며 감각으로 인식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만지는 현실 세계는 완전한 실재가 아니라 이데아를 모방한 세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현실을 다시 모방한 예술을 낮게 평가했다)
예를 들어 보자. 종이에 아무리 정교하게 원을 그려도 그것은 완벽한 원이 아니다. 확대해서 보면 미세한 흔들림이 있고, 선의 두께도 균일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원이 어떤 것인지 개념적으로 알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완벽한 원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원의 본질이며, 현실에서 우리가 그리는 모든 원은 단지 그 이데아를 흉내 낸 그림자에 불과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떠올리는 시간은 완벽하다. 단 한 번의 흔들림이나 오차 없이 영원히 동일한 속도로 흐른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정확히 재는 장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식 시계는 물론이고, 쿼츠 시계조차 온도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가장 정확하다고 알려진 원자시계조차도 완벽한 절대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세슘 원자시계는 대략 1억~3000만 년에 1초 정도의 오차를 보인다고 한다. 지구가 탄생했을 때부터 작동했다면 이 원자시계 또한 1분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현실 세계의 모든 시계는 완벽한 시간이라는 이데아를 향해 흘러갈 뿐이다. 시계 제작의 역사는 이런 이데아에 어떻게든 다가가려는 오랜 시도였다. 그 과정에서 투르비용, 콘스탄트 포스, 레조낭스 같은 수많은 기술들이 등장했다. 워치메이커는 시간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완벽하게 모방하려고 하지만 결코 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다가서려는 수많은 시도 속에서 새로운 시계가 탄생했다. 결국 기계식 시계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장치이며, 바로 그 때문에 기술인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있다.
시계가 정확성의 이데아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떤 길은 쭉 뻗은 직선도로처럼 비교적 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반면 어떤 길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그리 빠르지도 않고 심지어 쓸 데 없이 돌아간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기계식 시계의 레조낭스(Resonance) 기술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레조낭스는 공명 현상을 이용해 두 개의 밸런스 휠을 동기화하여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두 개의 밸런스 휠이 서로 공기나 플레이트를 통해 진동을 전달하면서 점차 같은 진동수로 동기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쪽 밸런스 휠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오차가 반대쪽 밸런스 휠에 의해서 상쇄되는 것이다.
최근 해외 웹진 ‘SJX’에서 레조낭스 시계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라그랑주 역학과 복잡한 운동 방정식이 교차하는, 마치 공대생이 말아주는 암호문 같은 글이었다. 물론 수학적으로 레조낭스 시계의 원리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레조낭스 시계 안에 숫자나 공식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데아에 다가서려는 워치메이커의 발걸음은 그저 공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공명 현상이란 두 개의 진동체가 서로 영향을 주어 같은 주기로 진동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였다. 1665년 어느 날 그는 벽에 걸린 두 개의 진자시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우연처럼 보였지만 그는 곧 이유를 발견했다. 두 시계는 벽을 통해 아주 미세한 진동을 서로 전달하고 있었고, 그 진동이 점점 서로의 진폭을 조정하면서 결국 하나의 안정된 진동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하위헌스는 이 현상을 응용하면 항해 중에도 안정적인 시간 측정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위헌스의 발견 이후, 이것을 워치메이킹에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 프랑스 워치메이커 앙티드 장비에(Antide Janvier)였다. 그는 두 개의 탈진기를 사용해 두 진자가 동일한 구조물에 매달리도록 서로 가까이 배치했다. 두 진자는 공명 상태를 유지했고, 시계의 정밀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공명 현상을 활용한 ‘더블 밸런스 휠’ 시계를 최초로 만들어낸 인물은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다. 그는 진자가 공명한다면 스프링 밸런스 휠 역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를 적용한 레조낭스 포켓워치를 제작했다. 그는 2개의 밸런스 휠을 매우 가깝게 배치하여 공명 현상이 일어날 수 있도록 설계했고, 심지어 그 사이에 얇은 공기 장벽을 추가하는 등 여러 가지를 실험도 감행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소형 시계에서 공명 현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일단 2개의 밸런스 휠에서 실제로 공명 현상이 일어나려면 2개 모두 충분한 정확도를 확보해야 한다. (브레게는 자신의 노트에 두 밸런스 휠의 오차가 하루에 20초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또한 배럴에서 안정적인 토크를 제공해서 진폭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결국 레조낭스 워치는 실용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없었고, 오랫동안 시계 역사에서 잊혀진 기술로 남게 되었다.
이런 레조낭스 시계를 현시대에 부활시킨 인물은 워치메이커 프랑수아 폴 주른(Francois-Paul Journe)이다. 그는 손목의 다양한 움직임으로 인해 시계 메커니즘이 반복적으로 충격을 받는 문제를 레조낭스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약 15년 동안 연구에 매진한 주른은 2000년 최초의 레조낭스 손목시계 ‘크로노미터 아 레조낭스(Chronomètre à Résonance)’를 완성했다. 이 시계는 기계적 동력 전달 장치 없이 자연 공명을 활용하는 세계 유일의 손목시계다.
다이얼에는 독립된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2개의 시간 표시 서브 다이얼이 있다. 왼쪽 다이얼은 24시간, 오른쪽 다이얼은 12시간으로 서로 다른 두 시간을 표시한다. 일종의 듀얼 타임 존 시계인데, 사실 진짜 목적은 2개의 독립된 시계를 서로 공명시키는 데 있다. 2020년 리뉴얼 된 가장 최신 버전의 크로노미터 아 레조낭스는 하나의 메인 스프링으로 두 개의 무브먼트에 동력을 공급한다. 다이얼 중앙에 드러난 기어에는 차동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이를 통해 메인 스프링의 에너지를 두 개의 기어 트레인에 독립적으로 전달한다. 각 기어 트레인에는 1초 주기의 레몽투아 데갈리테(Remontoir d’Egalité)가 장착되어 있으며, 이스케이프먼트에 전달되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 등시성에 기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스탄트 포스가 2개의 레귤레이터를 작동시키고, 서로 공명 현상을 일으키면서 상호 간에 정확성을 보정한다.
이 시계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복잡한 메커니즘 때문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계 기술은 하나의 레귤레이터를 정밀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레조낭스 워치는 완벽한 하나를 만드는 대신, 두 개의 진동자가 (물리적 장치 없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정확성을 끌어올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완벽한 시간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진동이 공명하며 안정된 균형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F.P. 주른의 크로노미터 아 레조낭스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 현시대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레조낭스 워치를 제작하는 또 하나의 드문 브랜드는 바로 아르민 스트롬(Armin Strom)이다. 2016년 출시된 미러드 포스 레조낭스 워치는 클러치 스프링으로 2개의 독립적인 밸런스를 연결해 공명 현상을 만들어낸다. F. P. 주른이 물리적 연결이 없는 관성 결합 방식이라면, 아르민 스트롬은 스프링 부품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된 탄성 결합 방식이다.
아르민 스트롬의 레조낭스 워치는 크게 두 가지다. 직경 43mm의 미러드 포스 레조낭스 워치는 오픈 워크 디자인으로 레조낭스 시스템의 독특한 구조를 드러낸다. 다이얼은 3시 방향으로 살짝 비켜서 있다. 시계는 좌우로 비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동시에 2개의 독립된 레귤레이터를 통해 위아래 방향으로는 대칭을 만들어낸다. 2개의 밸런스 휠은 9시 방향에 위치하고, 연결된 클러치 스프링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두 개의 초침을 통해 두 무브먼트가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트윈 세컨드 플라이백 메커니즘 덕분에 두 초침을 동시에 리셋시킬 수 있다.
이 한 제품에 머물지 않고, 아르민 스트롬은 2024년 새로운 칼리버 ARF22를 탑재한 ‘듀얼 타임 GMT 레조낭스 워치’도 선보였다. 이 시계는 F.P. 주른의 크로노미터 아 레조낭스 워치처럼 2개의 다이얼로 2개의 시간을 표시한다. 미러드 포스 레조낭스와 마찬가지로 클러치 스프링을 사용하지만 디자인은 완전히 달라졌다. 밸런스 휠을 12시 방향에 배치하고 두 개의 다이얼을 사용해 완벽한 좌우 대칭을 실현했다. 독립된 2개의 다이얼은 각각 시, 분, 낮/밤 표시 기능을 갖추고 있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작보다 무려 4mm나 줄어든 직경 39mm의 적당한 사이즈도 매력적이다.
이렇게 시계업계를 대표하는 두 가지 레조낭스 워치를 살펴봤다. (할디만의 H2 플라잉 레조낭스, 비아니 할터의 딥 스페이스 레조낭스 같은 시계들이 있지만 접근성이 너무 낮고 제작 수량도 제한적이어서 제외했다)
정확성의 이데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레조낭스는 투르비용과 지향점이 비슷한 기술이다. (외부에서 충격이 오면 두 밸런스 휠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충격 자체를 상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자세차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오차를 평균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 투르비용이 정확성보다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기술력에 더 많은 의미부여를 하는 것처럼, 레조낭스 역시 2개의 밸런스 휠이 대칭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비주얼에 보다 많은 의미부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조낭스 시계에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더 깊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레조낭스 워치는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확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2개의 분리된 시스템이 서로의 오차를 보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레조낭스 시계의 가장 시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일 레귤레이터의 성능에 집중하기보다는 두 레귤레이터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에서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레조낭스 워치는 20세기 구조주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사물의 의미가 개별 요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보았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했듯이 하나의 단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기보다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와 관계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레조낭스 시계 역시 마찬가지다. 정확성은 완벽한 하나의 레귤레이터에서 나오지 않는다. 두 레귤레이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안정된 시간이 탄생한다. 물론 그것은 사용자 입장에서는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아주 사소한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의미들은 그런 작은 차이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고, 여전히 인생에서 어려운 숙제 중 하나다. 돌이켜 보면 내가 관계에 서툴렀던 것은 상대방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나 혼자 귀를 막고 열심히 살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시계에 비유하면 하나의 레귤레이터에만 정성을 쏟은 것인데, 장인이 아니었던 탓인지 그렇게 만든 결과물은 그리 정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탈진기에서는 늘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 각자가 추구하는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레조낭스 워치가 그러하듯이 두 존재가 공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진동수가 일치해야 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주파수와 일치하는 것만 듣고, 그렇지 않은 것은 흘려보냈다. 이를 테면 선택적으로 공명했던 것인데, 돌이켜 보면 그건 진짜 레조낭스 워치가 아니라 유사 레조낭스 워치였던 것 같다.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리듬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리듬을 맞춰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름답게 공명할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장자의 사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공명 현상을 언급한다.
“물리학에는 공명(resonance)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소리굽쇠 A가 울리면 일정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소리굽쇠, 즉 같은 진동수를 가진 다른 소리굽쇠 B를 울리는 현상입니다. 만약 B가 A와 진동수가 다르면 B는 A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진동수가 같아야 B는 A의 소리에 반응해 함께 울게 됩니다. (중략) 실연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함께 울어주기는 힘든 법입니다. 반대로 실연의 경험이 있다면 친구의 아픔에 함께 울 수 있을 겁니다.”
– 강신주, <강신주의 장자수업>
진동수가 같아야 상대방의 소리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레조낭스 시계를 통해 확인했던 것과 같다. 하지만 이것이 우린 서로 진동수가 다르니 공명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여러 주파수가 공존하고 있고, 듣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듣고 공명할 수 있다. 장자는 <인간세> 편에서 공자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말한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다시 말해,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기’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과 주파수를 맞출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다. 기로 듣는다는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타자를 듣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철학자 강신주는 “특정 진동수를 갖고 있는 소리굽쇠가 아니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진동수를 갖고 있는 소리굽쇠를 상상해보라”고 조언한다. “A가 울려도 울고, B가 울려도 울고, C가 울려도 우는” 소리굽쇠 말이다.
레조낭스 워치 안에서는 두 개의 밸런스 휠이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바라본다’고 적었지만 사실 그 둘은 서로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두 존재는 서로의 주파수를 듣고, 조금씩 자신의 주파수를 조정하며 결국 하나의 시간에 도달한다.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온몸으로 ‘기’를 기울인다. 서로의 진동수에 ‘기’를 기울이고, 거기에 조금씩 맞춰갈 때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 강신주가 책에서 쓴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자와 반응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고유 진동수들을 늘리는 일” 뿐이다.
한정원 작가는 <시와 산책>이라는 책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 <영원과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알렉산더라는 늙은 시인인데, 레조낭스 워치에 대한 이 칼럼을 마무리하다가 우연히 책의 한 구절에 눈길이 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잠시 후 앞집에서 같은 음악을 튼다는 것. (중략) 나 역시 이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어딘가에 나의 메아리가 있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 한정원, ‘영원 속의 하루’, <시와 산책> 중에서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잠시 후 앞집에서 같은 음악이 들려오는 것처럼, 두 개의 레귤레이터는 서로에게 따뜻한 메아리가 되어준다. 어쩌면 레조낭스 워치는 정확성의 이데아로 향하는 가장 비효율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길일지도 모르겠다.
로그인하거나 가입하여 댓글을 남겨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