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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완성되는 시계미학 1부: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어제와 오늘

내가 그의 푸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시계가 되었다.

  • 이상우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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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완성되는 시계미학 1부: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어제와 오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에서

시계라는 자발적 귀차니즘

기계식 시계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용자와 끊임없이 교류한다는 것이다. 멈춘 시계의 태엽을 감아주고, 시간과 날짜를 다시 맞춰주는 것에서부터 장치를 유지·관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기계식 시계는 지속적으로 사용자의 ‘개입’과 ‘참여’를 요구한다. 매우 귀찮은 일이지만 실은 이 과정에서 시계와 사용자와의 정서적 유대감이 만들어지고, 시계는 실용적 물건을 넘어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된다. 사실 시계뿐만 아니라 모든 취미 활동은 자발적으로 ‘귀차니즘’을 즐겁게 수행하는 과정이다. (게임, 캠핑, 자전거 등등 모두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능동적 개입이야말로 실용적인 물건으로서의 시계와 취미로서의 시계가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용자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식 시계의 미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마도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일 것이다. 태엽이 충분히 감겨 있다면 기계식 시계 안의 거의 모든 컴플리케이션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제 할 일을 수행한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주인이 잠든 사이에도 2월 29일을 계산하고, 투르비용은 중력에 저항하며 계속 무심히 돌아간다. 하지만 크로노그래프만큼은 예외다. 누군가 푸셔를 누르기 전까지 초침은 12시 방향에 멈춰서 있을 뿐이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김춘수 시인의 <꽃>에 빗대어 말하자면, 내가 그의 푸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의 푸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시계가 된다. 게다가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태엽도 매번 손으로 직접 감아줘야 하기 때문에 개입의 강도가 더욱 세다. 손을 사용해 계속 시계와 교감하고, 그 과정에서 시계가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너무나 매력적인 컴플리케이션이다.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태엽도 매번 손으로 직접 감아줘야 하기 때문에 개입의 강도가 더욱 크다.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 1881~1943)은 『형태의 삶』에 붙인 짧은 글 「손을 예찬함」에서, 손을 정신의 도구로 보는 오랜 습관을 뒤집었다. 손은 정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부속이 아니라, 정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먼저 만져보고 정신을 가르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그 문장을 가장 정직하게 증명하는 물건 중 하나다. 크라운과 푸셔를 손으로 직접 조작하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기계식 시계의 멋과 가치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시간을 쓰다: 크로노그래프라는 이름의 기원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말 그대로 로터 없이 손으로 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말한다. 따라서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탄생하기 이전의 초기 크로노그래프의 역사가 곧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크로노그래프의 역사는 손목시계 이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는 그리스어 크로노스(chronos, 시간)와 그라페인(graphein, 쓰다)의 합성어다. 시간을 ‘쓰는’ 기계라는 뜻인데, 이는 초기 크로노그래프 장치가 잉크로 시간을 기록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2013년 루이 모네의 ‘콩테르 드 티에르스(compteur de tierces, 3분초 계수기)’라는 물건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발명자는 니콜라스 뤼섹(Nicolas Mathieu Rieussec)이었다. 1821년 9월 1일, 파리 샹드마르스 경마장에서 뤼섹은 자신이 발명한 계측기를 선보였다. 이 장치는 에나멜을 입힌 두 개의 다이얼이 회전하고, 그 위에 스타일러스가 붙어 있는 형태다. 경주가 시작될 때 스타일러스를 눌러 잉크 방울을 찍고, 끝날 때 다시 찍는 방식으로 경과 시간을 측정했다. 뤼섹의 발명품은 우승마 하나가 아니라 출전한 말 전부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5일,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의록에 이 장치가 ‘초 단위의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e à secondes)’로 기재되었다. ‘크로노그래프’라는 단어가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뤼섹의 기계는 시간을 문자 그대로 ‘썼는데’, 바로 그 점이 한계이기도 했다. 잉크는 한 번 쓰면 지워지지 않았고, 다이얼이 잉크로 채워지면 다시 계측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뤼섹이 발명한 크로노그래프 장치

크로노그래프 워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메커니즘은 다시 계측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핸즈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되돌아가는 방법을 발명한 사람은 아돌프 니콜(Adolphe Nicole)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1844년 출원한 특허의 핵심은 하트형 캠이었다. 심장 모양으로 깎인 캠 위에 해머가 떨어지면, 캠은 자기 곡면을 따라 미끄러지며 가장 깊은 골이 해머 밑으로 오는 위치까지 회전한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든, 해머가 한 번 떨어지면 초침은 반드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잉크 없이 몇 번이고 다시 시간을 잴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콜은 1862년 결합 방식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꾸고, 컬럼휠을 제어 기관으로 도입했으며, 하나의 푸시버튼으로 시작, 정지, 복귀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크로노그래프 포켓 워치를 만들었다. 

  • 아돌프 니콜이 1844년 특허 출원한 하트형 캠

  • 니콜이 1862년 개발한 컬럼휠 장치

손목 위에 정착한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면서 크로노그래프에도 변화가 생긴다. 시계의 사이즈와 형태가 바뀌면서 푸셔를 누르는 방식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손목시계용 크로노그래프의 기원으로 흔히 1913년 론진의 칼리버 13.33Z를 꼽는다. 이는 최초의 양산형 손목시계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로, 13리뉴(약 29mm) 직경에 6mm의 두께, 시간당 18,000회 진동하는 헤어스프링과 컬럼휠을 갖춘 무브먼트였다. 초기형은 크라운과 같은 축에 푸셔가 붙은 모노푸셔 방식이었고, 이후 2시 방향에 별도 푸셔를 두는 형태로 진화했다. 

  • 1913년 등장한 론진의 칼리버 13.33Z

  • 론진의 초기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

같은 시기 브라이틀링에서는 크로노그래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1915년, 가스통 브라이틀링은 크라운과 분리된 독립 푸셔를 2시 방향에 배치한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제작했고, 1923년에는 2시 푸셔로 정지와 재시작을, 크라운 조작으로 리셋을 수행하는 분리 구조를 확보했다. 그리고 1934년 윌리 브라이틀링이 4시 방향에 두 번째 푸셔를 배치한 ‘No. 100 크로노그래프 콩퇴르(Chronographe Compteur)’를 완성했다. 오늘날 크로노그래프의 전형적인 푸셔 배치가 마침내 확립된 것이다. 이렇게 20세기 초반 약 20년에 걸치는 시간 동안 크라운에 붙어 있던 모노 푸셔는 크라운에서 완전히 분리된 2개의 푸셔로 분화되었다. 하나는 스타트와 정지, 그리고 또 하나는 리셋이다. 그렇게 인간이 시계에 개입할 수 있는 경로가 늘어났고, 이는 오늘날까지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기본 문법으로 남아 있다. 

4시 방향에 두 번째 푸셔를 배치한 브라이틀링의 ‘No. 100 크로노그래프 콩퇴르’

초기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에보슈 편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시계 브랜드들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자체적으로 제작하지 않았다. 에보슈(ébauche) 제조사가 무브먼트를 설계하고 생산하면, 시계 회사가 그것을 구입해 자신들이 디자인한 케이스에 넣어서 판매했다. 크로노그래프는 부품 수가 많고 조정이 까다로워 자체 개발 부담이 컸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분업은 최고급 브랜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날 고가에 거래되는 파텍 필립의 빈티지 크로노그래프조차 범용 무브먼트를 사용했다. 따라서 초기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이해하려면 시계 브랜드보다는 주요 에보슈 제조사와 그들이 만든 개별 무브먼트에 주목해야 한다. 

발주(Valjoux)

발주(Valjoux)는 1901년 존 로이몽(John Reymond)과 샤를 로이몽(Charles Reymond) 형제가 스위스 발레 드 주의 르 브라쉬(Le Brassus)에 세운 회사로, 이름 자체가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의 축약이다. 발주는 처음부터 크로노그래프 에보슈에 집중했고, 20세기 내내 사실상 이 분야의 표준 공급자로 활약했다. 

# 발주 23
발주 23은 1916년부터 1974년까지 생산되었다. 13리뉴(29.5mm) 직경에 두께 5.85mm였고,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갖췄으며, 시간당 18,000회 진동으로 48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했다. 생산 수량은 약 12만 6,500여 개로 알려져 있다. 발주 23이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은 이 무브먼트를 사용한 시계들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파텍 필립 Ref. 1518(1941~1954년)과 Ref. 2499(1951~1985년)가 모두 발주 23을 베이스로 제작되었다. Ref. 1518은 세계 최초로 양산된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이고 총 281개만 제작되었으며, Ref. 2499는 4개 시리즈로 349개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엄청난 물건들이다. 그 외에도 브라이틀링, 호이어, 롤렉스, 지라드 페리고, 티쏘, 독사, 조디악 등이 이 무브먼트를 썼다. 후속 무브먼트인 발주 236에서는 진동수가 시간당 21,600회로 증가했다. 참고로 2026년 일본의 독립 브랜드 나오야 히다가 복원해 사용한 것이 바로 이 발주 236이다.

  • 발주 23 기반의 파텍 필립 무브먼트

  • 복원한 발주 23 무브먼트를 탑재한 브레몽의 한정판 크로노그래프

# 발주 72
발주 72는 1938년부터 1974년까지 생산되었다. 지름 13리뉴(29.5mm)에 두께는 6.95mm로 발주 23에 비해 조금 늘었다. 시간당 18,000회 진동하며, 파워리저브는 48시간이다. 발주 72는 발주 23에서 6시 방향에 12시간 카운터가 추가된 무브먼트인데, 이 과정에서 9시 스몰세컨드, 3시 30분 카운터, 6시 12시간 카운터라는 ‘3·6·9’ 서브다이얼 배치가 업계 표준 문법이 되었다. 물론 최초로 트리플 레지스터 크로노그래프를 선보인 것은 유니버설 제네브의 컴팩스(1936년)다. 하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분명 발주 72일 것이다. 탑재 모델의 면면도 화려하다. 롤렉스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의 초기 칼리버 72B와 뒤이은 722, 727이 모두 발주 72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호이어 까레라 Ref. 2447과 오타비아 Ref. 2446도 이 무브먼트를 썼고, 1954년 1세대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의 초기 모델의 엔진 역시 발주 72였다. 그밖에도 예거 르쿨트르를 포함해 스무 곳이 넘는 브랜드가 이 무브먼트를 채택했다. 사실상 1960년대 스포츠 크로노그래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명기다. 최근 싱어 리이매진드(Singer Reimagined)에서 이 무브먼트를 복원한 헤리티지 V72를 출시하기도 했다.

  • 발주 72를 탑재한 초기 롤렉스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

  • 발주 72를 복원한 싱어 리이매진드의 헤리티지 V72

# 발주 7730 계열 
발주 7730 계열은 그 계보가 조금 복잡하다. 원래 발주 7730은 비너스(Venus SA)가 1948년에 만든 칼리버 188이었다. 1966년 발주가 비너스를 인수하면서 레귤레이터와 스터드 등 약간의 설계 변경과 함께 이름을 바꿔 발주 7730이 되었고, 해머 구조를 개량한 발주 7733이 1969년에 나왔다. 발주 7734는 7733에 날짜창을 더한 버전이고, 7736은 12시간 카운터 버전, 7737은 요트 레이스용 레가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공통 사양은 지름 31.0mm, 두께 6.0mm, 시간당 18,000회 진동에 파워리저브 45시간으로, 앞의 두 무브먼트(발주 23, 발주 72)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크로노그래프 제어 방식이다. 발주 7730 계열은 컬럼휠 대신 캠을 사용한다. 회전하는 기둥 대신 캠이 미끄러지며 레버를 밀어내는 구조로, 만들기 쉽고 조립이 빠르다. 따라서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 크로노그래프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20세기 중반 브라이틀링 탑 타임, 호이어 오타비아를 비롯하여 IWC, 해밀턴 등의 브랜드에서 발주 7730 계열의 무브먼트를 썼다. 특히 발주 7733의 설계는 훗날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최대 베스트셀러가 되는 발주 7750의 직접적인 모태가 된다. 발주 7750 역시 세계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탄생한 1969년에 이미 태어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캠 방식으로 작동하는 발주 7730

비너스(Venus SA)

비너스(Venus SA)는 1923년 스위스 무티에(Moutier)에 설립되었고 1928년 에보슈 SA에 편입되었다가 1966년 발주에 흡수되었다. 발주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회사가 남긴 유산은 크로노그래프 워치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비너스 175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생산되었다. 직경 31.0mm에 두께 5.7mm,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갖췄다. 이 비너스 175를 기반으로 스플릿 세컨드(179, 185, 189)와 풀캘린더(191, 198) 무브먼트까지 개발되는 등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브라이틀링의 크로노맷 Ref. 769와 Ref. 178이 이 무브먼트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이 무브먼트는 오늘날 수많은 보급형 수동 크로노그래프 워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1961년, 비너스는 175의 생산 설비 일체를 중국 톈진 시계공장에 매각했고, 1963년부터 이 설비에서 ‘씨걸 ST19(ST1901)’라는 이름의 무브먼트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지만 혈통을 따지자면 스위스 태생인 것. 이 무브먼트는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제작하려는 마이크로 브랜드가 기댈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 비너스 175

  • 비너스 175의 아키텍처로 제작되는 중국의 씨걸 ST19 무브먼트

# 비너스 178
비너스 175 계열의 3레지스터 버전이다. 1956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Ref. 806에 들어갔다. 1954년 출시된 내비타이머는 초기에 발주 72가 탑재되었다가 1956년부터 비너스 178이 탑재되었다.

비너스 178을 탑재한 내비타이머 Ref. 806 (왼쪽은 복각 모델, 오른쪽은 오리지널 모델)

# 비너스 188
1948년에 등장한 캠 방식 무브먼트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6년 발주 인수 후 발주 7730이 되었다. 175, 178과는 아예 계열 자체가 다른 무브먼트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발주 7750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르마니아(Lemania)

르마니아(Lemania)는 1884년 알프레드 뤼그랭(Alfred Lugrin)이 스위스 발레 드 주의 로리앙(L’Orient)에 세운 회사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설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 르마니아 2310
르마니아 27 CHRO C12(르마니아 2310)은 1942년, 르마니아의 기술이사 알베르 귀스타브 피게(Albert-Gustave Piguet)가 설계했다. 지름 12리뉴(27mm)에 두께 6.74m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였다. (문워치의 서브 카운터가 중앙으로 몰려 있는 이유다)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쓰고 시간당 18,000회 진동하며, 훗날 르마니아 231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무브먼트가 유명해진 것은 오메가의 우주 스토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46년 오메가는 이 무브먼트를 칼리버 321로 채택해 1957년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CK2915에 탑재했다. 스피드마스터는 1965년 NASA 인증을 통과했고, 1969년 아폴로 11호와 함께 달에 착륙했다. 한편 오메가는 2019년 에드 화이트가 우주에서 착용했던 개체를 단층 촬영해 칼리버 321을 50년 만에 복원해냈다. 덕분에 시계애호가들은 오리지널 르마니아 2310을 새 제품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르마니아 2310은 특유의 안정성과 아름다운 설계 구조로 하이엔드 브랜드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칼리버 1142은 르마니아 2310를 기반으로 제작된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로 2015년 히스토릭 콘 드 바슈 1955에 탑재되었다. 파텍 필립이 1986년부터 쓴 CH 27-70 역시 같은 뿌리이며, 브레게의 칼리버 533.3 역시 마찬가지다. 

2019년 새롭게 복원한 르마니아 2310 기반의 오메가 칼리버 321

랑드롱(Landeron)

랑드롱(Landeron)은 르 랑드롱 마을의 한 & Cie.(Hahn & Cie.)가 모체인 회사다. 1937년에 내놓은 칼리버 47은 세계 최초의 캠 스위칭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였고, 뒤이어 칼리버 48이 나왔다. 규격은 지름 31mm에 두께 6.2mm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조작계다. 랑드롱 48 계열은 2시 푸셔가 시작만 담당하고, 두 번째 푸셔가 정지와 리셋을 함께 맡았다. 앞서 본 브라이틀링식 문법과는 다른 배치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구성을 갖춘 것은 후속 칼리버 149에 이르러서다. 랑드롱 48 계열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누적 약 350만 개 이상 생산되었는데, 앞서 발주 23의 총 생산량이 12만 6,500여 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많은 물량이 만들어졌다. 랑드롱 칼리버 48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크로노그래프 워치 보급에 기여했으며, 호이어, 보메 메르시에, 조디악, 글라이신 등에서 활용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호이어 카레라다. 컬럼휠 방식의 발주 72를 쓴 카레라와 캠 방식의 랑드롱을 쓴 카레라가 공존했던 것. 참고로 랑드롱의 칼리버 48은 동력 연결에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사용한다. 1887년 에두아르 호이어가 특허를 낸 방식으로, 양쪽 끝에 작은 톱니가 깎인 짧은 축을 두고, 그 축이 시소처럼 기울면서 크로노그래프 휠에 맞물리게 하는 구조다. 부품이 적고 얇게 만들 수 있어 대량 생산에 유리하며, 훗날 발주 7750이 같은 방식을 채택한다. 칼리버 48은 1970년경 생산을 마쳤다.

랑드롱 칼리버 48

엑셀시오르 파크(Excelsior Park)

엑셀시오르 파크(Excelsior Park)는 1866년 쥘 프레데릭 잔느레(Jules-Frédéric Jeanneret)가 창업한 회사로, 1891년에 이미 크로노그래프 특허를 냈다. 칼리버 JB40은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만들어진 14리뉴(31.60mm) 무브먼트로,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사용했으며, 12시간 카운터를 갖췄다. 여러 차례 사명이 바뀌다가 1902년 이후 잔느레브렘(Jeanneret-Brehm)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1925년에 이르러 엑셀시오르 파크가 된다. 캘리버 JB40의 ‘JB’도 잔느레브렘에서 가져온 것이다. 갈레, 제니스, 지라드 페리고 등에서 이 무브먼트를 썼으며, 마감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사양은 최상급이었던 꽤 고급 에보슈 무브먼트였다. 회사는 1983년 쿼츠 위기 속에서 문을 닫았다.

  • 엑셀시오르 파크의 칼리버 JB40

  • 엑셀시오르 파크는 에보슈 공급뿐만 아니라 직접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초기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인하우스 편
론진(Longines)

에보슈를 사다 쓰는 것이 관행이던 시대에 론진(Longines)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직접 만들었고, 그중 2개는 오늘날까지 최고의 수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로 꼽힌다. 먼저 1936년 발표된 론진의 칼리버 13ZN은 최초의 양산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크로노그래프가 작동하는 중에 리셋 푸셔를 누르면 초침이 0으로 돌아갔다가 손을 떼는 즉시 다시 작동을 시작한다. 정지·복귀·재시작 세 동작을 한 번의 동작으로 압축시켜 보다 빠르게 시간 계측을 재개할 수 있었다. 플라이백 기능은 주로 20세기 초반 파일럿들에게 필요했다. 전자 장비가 없던 시절, 파일럿들은 거리와 시간을 활용해 단계적으로 경로를 계획했다. 주로 강, 산, 철로 등 지상의 눈에 잘 띄는 표시를 따라 방향을 정했는데 이때 각 비행 구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보다 신속한 재측정 기능이 필요했던 것. 

또 다른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칼리버 30CH는 1947년에 도입되어 1970년대 초까지 생산되었고, 1970년에 칼리버 53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직경 29.8mm에 두께 6.2mm, 시간당 18,000회 진동했고,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 그리고 역시 플라이백 기능을 갖췄다. 이 무브먼트는 13ZN을 생산 및 효율 측면에서 다시 설계한 무브먼트다. 화려하지 않지만 균형이 좋아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가장 완성도 높은 수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최초의 양산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론진의 13ZN

  • 칼리버 30CH를 탑재한 론진의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워치(1965)

  • 칼리버 30CH

미네르바(Minerva)

미네르바(Minerva)는 1858년 스위스 빌레레에서 창업했고 1887년에 상표를 등록했다. 1908년 첫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9-09를 만들었으며, 1910년대 중반에는 100분의 1초 계측에 도달할 만큼 크로노그래프 명가 중 하나였다. 미네르바의 대표적인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칼리버 13-20과 칼리버 17-29다. 칼리버 13-20은 1923년경부터 생산된 직경 약 28.9mm(13리뉴)의 손목시계용 컬럼휠 크로노그래프다. 처음에는 기둥 5개의 컬럼휠을 쓴 모노푸셔로 나왔고, 이후 기둥 6개의 2푸셔 버전이 더해졌다. 2푸셔 버전의 경우 크라운에서 37도 각도로 벌어진 푸셔 배치가 특징이었다. 칼리버 17-29는 17리뉴(37.90mm)에 두께 5.85mm의 대형 무브먼트다. 5개 기둥의 컬럼휠에 모노푸셔 방식을 적용했고, 3시 방향에 30분 카운터를 배치했다. 미네르바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독특한 비주얼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V자로 뻗은 크로노그래프 브리지와, 끝이 길게 말려 올라가서 일명 ‘악마의 꼬리(devil’s tail)’라고 부르는 레버 형태가 대표적이다. 미네르바는 쿼츠 위기 속에서도 경영을 이어가다가 2006년 10월 리치몬트에 인수되었고, 이듬해 몽블랑 산하로 편입되었다. 현재 몽블랑의 칼리버 MB M16.31은 칼리버 17-29의 구조를 기반으로 제작된 모노푸셔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이고, MB M13.21은 13-20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 미네르바 칼리버 13-20

  • 미네르바 칼리버 17-29

  • 몽블랑의 칼리버 MB M16.31

유니버설 제네브(Univasal Genève)

칼리버 281 계열은 유니버설 제네브(Universal Genève)에서 1932년부터 1970년까지 쓰인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8개 기둥의 컬럼휠과 브레게 헤어스프링을 사용했고, 두께는 유니 컴팩스용이 5.50mm, 컴팩스와 트라이 컴팩스용이 7.15mm였다. 1934년 2카운터 모델(컴퍼, Compur)이 먼저 나왔고, 여기에 12시간 카운터를 더한 컴팩스(Compax)가 1936년에 등장했다. 이 컴팩스는 12시간 카운터를 갖춘 최초의 손목시계 크로노그래프로 알려져 있다. 1940년에는 12시 방향에 독립된 시·분침으로 네 번째 서브다이얼을 얹은 아에로 컴팩스(Aero-Compax)가 나왔고, 45분 카운터를 쓴 2레지스터 모델 유니 컴팩스(Uni-Compax)가 뒤따랐다. 그리고 1944년,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트라이 컴팩스(Tri-Compax)가 등장한다. ‘트라이’는 세 가지 기능을 뜻하는데, 크로노그래프, 풀캘린더, 문페이즈를 함께 담은 브랜드의 플래그십이었다. 쿼츠 위기 속에서 사라졌던 유니버설 제네브는 최근 다시 부활했다. 2023년 12월 브라이틀링이 브랜드를 인수하여 2026년 4월 재출범한 것. 정식 론칭에 앞서 2025년 11월, 복원한 빈티지 칼리버 281을 넣은 트리뷰트 투 컴팩스 3종 2세트를 한정판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 칼리버 281에서 파생된 컴퍼와 컴팩스 모델

  • 트리뷰트 투 컴팩스 제작을 위해 복원한 빈티지 칼리버 281

안젤루스(Angelus)

안젤루스(Angelus)는 1925년경 지름 14리뉴(32.8mm)의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SF15를 선보이면서 크로노그래프 시장에 진입했고, 1935년경 2푸셔 방식의 SF210으로 진화했다. SF215는 1930년대 말에 나온 SF210의 개량형으로, 역시 14리뉴 사이즈의 컬럼휠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다. 1940년대 초 파네라이의 크로노그래프 워치 마레 노스트룸 프로토타입에 들어간 것이 바로 안젤루스의 SF215다. 1942년에 나온 SF217은 45분 카운터에 풀캘린더를 더한 무브먼트로, 안젤루스의 히트작인 크로노다토(Chronodato)에 탑재되었다. 

  • 안젤루스 SF210

  • 안젤루스 SF215를 탑재한 파네라이의 마레 노스트룸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죽음과 부활

1969년은 크로노그래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해다.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세 곳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먼저 제니스는 1969년 1월 엘 프리메로 칼리버 3019 PHC를 발표했다. 1962년 개발을 시작한 이 무브먼트는 시간당 36,000회 진동하는 완전 통합형 자동 크로노그래프였다.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갖췄으며, 같은 해 10월부터 양산이 이뤄졌다. 호이어·브라이틀링·뷰렌·해밀턴·뒤부아 데프라가 ‘프로젝트 99’라는 이름으로 함께 개발한 칼리버 11은 1969년 3월 발표되어 8월에 시판되었다. 이 무브먼트는 뷰렌의 마이크로로터 자동 무브먼트 위에 뒤부아 데프라의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얹은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한편 세이코 6139는 1969년 5월에 일본에서 출시되었다. 통합형 자동 크로노그래프로 컬럼휠을 쓰면서 수직 클러치를 채택한 최초의 양산 손목 크로노그래프이기도 하다. 

누가 최초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기를 지나며 고급 수동 크로노그래프 에보슈가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이다. 상위 세그먼트가 자동 무브먼트로 옮겨가자 컬럼휠 수동 무브먼트를 만들 이유가 줄었고, 뒤이어 닥친 쿼츠 위기가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결국 발주 23과 발주 72는 1974년에 나란히 생산을 멈췄다. 살아남은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발주 7733과 7734 같은 저가 캠 방식뿐이었고, 이마저도 1978년 무렵 대부분 정리되었다.

  • 제니스의 엘 프리메로 칼리버 3019 PHC

  • 5개 회사가 공동 개발한 칼리버 11

  • 세이코 6139 무브먼트

1970년대 시작된 쿼츠 위기는 수동 크로노그래프뿐만 아니라 기계식 시계 시장 전체를 붕괴시켰다. 하지만 1990년대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면서 사라졌던 수동 크로노그래프도 다시 돌아왔다. 쿼츠 시계와 차별화하기 위해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은 고급화에 주력했고, 이를 위해서는 기계적으로 보다 복잡하고 특별한 무브먼트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터 없이 다양한 부품과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기계식 시계의 미학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컴플리케이션이었고, 몇몇 하이엔드 브랜드를 중심으로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1999년 출시된 랑에 운트 죄네 다토그래프 1세대 모델

그중에서도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부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모델이 바로 1999년 등장한 랑에 운트 죄네의 다토그래프다. 여기에 탑재된 칼리버 L951.1은 컬럼휠과 수평 클러치를 갖춘 수동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였고, 여기에 점핑 분 카운터와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함께 넣었다. 특히 무브먼트의 피니싱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저먼 실버로 제작한 메인 플레이트와 브리지에 총 405개 부품이 사용되었고, 손으로 새긴 밸런스 코크, 블루 스크루로 고정한 골드 샤통에 이르기까지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다토그래프의 무브먼트

이 시계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1999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쿼츠 위기를 거치면서 많은 기계식 무브먼트가 사라졌고, 대부분의 브랜드는 에보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크로노그래프는 특히 선택지가 좁아서 발주 7750이나 르마니아 2310 정도가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심지어 그 르마니아마저 1999년 스와치그룹이 브레게와 함께 인수하면서 외부 공급을 제한했다. 사실상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쿼츠 위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플라이백과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갖춘 정통 수동 크로노그래프가, 그것도 스위스가 아닌 독일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시계 업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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