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기

지금 당장, 스마트 워치를 벗어라

디지털 시대, 빼앗긴 시간을 되찾는 방법에 관하여

  • 이상우
  • 2025.06.23
SNS Share
  • Facebook
  • X
  • Kakao
https://www.klocca.com/article/%ec%a7%80%ea%b8%88-%eb%8b%b9%ec%9e%a5-%ec%8a%a4%eb%a7%88%ed%8a%b8-%ec%9b%8c%ec%b9%98%eb%a5%bc-%eb%b2%97%ec%96%b4%eb%9d%bc/
복사
지금 당장, 스마트 워치를 벗어라

8시 15분.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도 출근 준비를 한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마지막에 그날 착용할 시계를 고르는데, (시계를 먼저 고르고 거기에 맞는 옷을 입기도 한다) 이 순간이 하루 중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최초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선택권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이런 작은 선택도 큰 즐거움이다. 주로 그날의 기분, 날씨, 옷차림, 일정, 만나야 하는 사람, 써야 하는 원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선택한다. 그러니까 시계를 선택한다는 건, 그날 내 감정의 표현인 동시에, 하루를 어떻게 보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자 태도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계로는 모든 상황을 표현하기 어렵기에 노트에 좋은 문장을 모으듯 시계를 수집하다보니 꽤 많은 시계가 있다. 대략 10개 남짓인데, 여전히 마음의 보관함에는 채워지지 않은 빈 구멍이 많다. 이 보관함은 크기가 무한에 가까워서 아마도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다 채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느 마약 중독자가 그랬다지. 끊는 게 아니라고. 평생 참고 사는 거라고…

시계를 선택한다는 건 오늘 하루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자 태도다. ⓒ HOLME & HADFIELD

나의 스마트하지 않은 스마트 워치

주로 기계식 시계로 채워진 보관함에는 스마트 워치도 하나 있다. 하지만 그걸 착용하는 날은 손에 꼽는다. 전원은 늘 꺼져 있고, 어쩌다 가끔 착용할 때는 초기 화면이 뜰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착용 과정부터 이미 스마트하지 않다. 내 스마트 워치는 2022년 구입한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슈퍼마리오 한정판. 태그호이어와 닌텐도가 협업한 첫 모델이다. 스마트 워치라곤 하지만 애플이나 삼성에서 대량 생산한 일반 스마트 워치와는 결이 다르긴 하다. 가격은 비싼데 성능이나 편의성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다. 그럼에도 굳이 이걸 구입했던 건 성능이나 편의성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계를 구입한 건 기계식 시계를 구입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히 스마트한 삶을 살고 싶거나 편리함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본체가 너무 크고 충전도 해줘야 해서 불편하다) ‘슈퍼마리오’ 테마를 구현한 고퀄리티 손목시계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리오가 하루 종일 손목에서 뛰어 놀면 그걸로 충분했다. 많이 걸으면 마리오의 애니메이션이 바뀌기 때문에 초기엔 주로 산책할 때 많이 착용했던 것 같다. 가끔은 아이들과 닌텐도 게임을 할 때 착용하기도 했다. 사실 이 모델도 꽤 오래 전에 후속 모델이 나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반응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성능만 따지자면 진작 버려졌을 물건이다. 아마 일반 스마트 워치라면 안 쓰고 방치하거나 기변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맥락’에서는 성능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끔 마리오가 움직이는 걸 보고, 시간만 확인하면 충분했다. 스마트 워치라고 하지만 내게는 마리오 캐릭터를 볼 수 있는 쿼츠 시계 정도의 느낌이랄까? 

 

  •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슈퍼마리오 리미티드 에디션

  • 마리오가 손목에서 뛰어 놀면 그걸로 충분하다.

내 스마트 워치가 다른 일반 시계처럼 소비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일단 ‘태그호이어’라는 브랜드의 힘이 클 것 같다. 태그호이어가 닌텐도와 공식적으로 협업해서 시계를 출시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사람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내가 그랬다) 태그호이어의 헤리티지는 스마트 워치에도 일부 녹아 있다. 예컨대 이 스마트 워치의 러그 디자인은 까레라의 러그 디자인을 가져온 것이다. 무엇보다 스마트 워치지만 물리적으로 차별화된 디자인 요소를 심어 놓았다. 세라믹 베젤에 새긴 버섯·배관·별 아이콘, 마리오를 상징하는 크라운의 ‘M’ 이니셜, 그리고 검정과 레드 컬러 조합 같은 것들이다. 사실 워치 페이스의 화면은 어떤 스마트 워치에도 넣을 수 있다. 실제로 태그호이어의 일반 커넥티드 모델에도 한정판의 마리오 화면을 다운 받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느낌은 아니다. 하드웨어에 물리적으로 마리오 테마가 있어야 그 안에 담긴 소프트웨어도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시계 전체가 슈퍼마리오의 테마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계 곳곳에 새겨진 슈퍼마리오의 흔적과 전용 워치 페이스 덕분에 내 스마트 워치는 세월이 흘러도 그럭저럭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서 조금은 비켜서 있는 셈이다. 물론 갈수록 속도는 느려지고 배터리도 점점 줄어들겠지만 (평소에 전원을 꺼두는 이유다) 완전히 방전되거나 고장 나기 전까지는 다른 시계와 마찬가지로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하찮은 기능에 비해서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기계식 시계도 마찬가지 아닌가. 심지어 마리오가 뛰어다니지도 않는데 더 비싸잖아…

  • 마리오를 상징하는 크라운의 'M' 이니셜

  • 버클의 'M' 이니셜

‘스마트’ 워치 vs 스마트 ‘워치’

내 한정판 스마트 워치를 구구절절 소개한 건, 일반 시계와 스마트 워치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물건인지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스마트 워치는 형식 자체는 IT 제품이지만 내가 제품을 인식하고 사용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기계식 시계나 쿼츠 시계에서 경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품을 구입할 때 나는 시계의 성능과 기능이 아닌 스토리와 콘셉트에 더 끌렸다. 성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버린다. 그리고 더 높은 성능의 제품이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남루하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쌓이면서 풍성해진다. 결국 핵심은 기능이나 성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이다.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 그리고 시계 자체의 디자인과 콘셉트, 그리고 그것이 환기시키는 기분과 감정들. 그런 것들이 실은 시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스마트 워치’라는 단어에서 ‘스마트’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워치’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스마트 워치는 ‘워치’가 아닌 ‘스마트’에 방점이 찍혀 있다. ‘워치’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사실 스마트 워치는 손목에 착용한다는 점만 공유할 뿐 시계와는 아예 다른 물건이다. 스마트 워치는 스마트폰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다. 시간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여러 부가기능 중 하나에 불과하다. 물론 오늘날 기계식 시계 역시 시간을 확인하는 본래 목적은 많이 희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성은 매우 중요한데 그건 정확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계식 시계와 스마트 워치는 양 극단에 있지만 ‘시간 측정의 도구’라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비슷한 물건일지도 모르겠다. ‘시계’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정작 시간 측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스마트 워치는 시계가 아닌 스마트폰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다.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남루하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쌓이면서 풍성해진다.
우리는 왜 시계를 손목에 올리는가?

모리츠 그로스만 유니버설자이트

극단적으로 말하면 스마트워치는 스마트폰을 축소해 손목에 올려놓는 장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행위를 기꺼이 수행한다. 심지어 돈을 지불하면서. 이건 기계식 시계를 손목에 올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쯤에서 이런 근원적인 물음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손목에 무언가를 올려놓는 것일까? 각자 이유가 다르겠지만 내 경우 시계가 손목에서 차지하는 지분의 8할은 패션 아이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계를 손목에 착용한다는 건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아름답고 기계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게다가 매력적인 역사와 스토리까지 갖춘 물건을 하루 종일 손목에 감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부가기능이 10%, 그리고 안차면 뭔가 허전해서 습관적으로 착용하는 것이 나머지 10% 정도겠다. 

어쨌든 불편함을 넘어서는 기쁨과 만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계를 기꺼이 착용한다. 스마트 워치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가볍고 편하다고는 하지만 신체에 뭔가 붙여둔다는 건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박찬용 작가는 저서 <좋은 물건 고르는 법>에서 인간의 몸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오브제는 귀금속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안경과 시계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스마트 워치는 어쩌면 손목시계의 역사·문화에 무임승차한 디바이스가 아닐까? 손목시계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문화, 즉 ‘손목에 무언가를 착용한다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이미 확산되어 있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빨리 손목에 전자제품을 채울 수 있었을까? 게다가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인간의 몸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오브제는 기껏해야 안경과 시계 정도다. 사진은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앰버서더 래니 크레비츠.

내 기준에서 스마트 워치는 별로 예쁜 물건이 아니다. 일종의 직업병처럼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손목부터 살피게 되는데, 요즘엔 지하철을 타면 일반 시계를 착용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애플워치 아니면 갤럭시워치다. 모두가 손목에 같은 검정 디스플레이를 붙이고 있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논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제품 디자인이 뛰어나더라도 이건 미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영하 작가가 오래 전 인터뷰에서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할 때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 또한 동의하는 바다. 내가 시계에서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현재 시간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다. 시계는 아주 오래 전에 우리가 시간을 측정했던 형식이며, 지구 저편에서 누군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이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꽤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이기도 하다. 시계를 바라볼 때는 그 물건 안에 쌓여 있는 시간까지 함께 바라보게 되는데, 그건 물성이 없는 디지털 화면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이건 스마트 워치와 시계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낡아버린 폐기물과 무르익은 빈티지를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모두가 손목에 같은 검정 디스플레이를 붙이고 있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논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과유불급

어쨌든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다는 건 그걸 뛰어넘는 기쁨이나 혜택이 있다는 의미일 거다. 나는 애플이나 삼성 같은 메이저 브랜드의 최첨단 스마트 워치를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 정보를 통해 습득한 피상적인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어떤 혜택이 있을까? 일단은 휴대폰을 쳐다볼 일을 줄여준다(고 한다). 카톡 알림 같은 게 오면 답장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손목을 보고 바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휴대폰에서 재생되는 음악이나 동영상을 제어할 수도 있고, 어디에 뒀는지 모를 휴대폰을 찾을 때도 유용하다(고 한다). 요즘에는 혈압, 맥박, 수면시간 같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추적해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더 있겠지만 대충 생각나는 건 이 정도다. 

물론 직업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서 누군가에는 꼭 필요한 기능이겠지만 나는 이런 기능들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 싶다. 뭔가 좋은 걸 제공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스마트 워치가 내게 제공하는 정보들은 삶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스마트 워치가 없을 때도 우리는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보들이 내 삶에 실시간으로 침범하면서 없던 불편함이 생겨난다. 뭔가 체크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필요 이상의 정보가 들어오면 뇌는 또 에너지를 써야 한다. 각종 센서로 몸 상태를 파악하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그런 수치들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갑자기 당뇨 환자가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풍경, 좋은 사람, 좋은 물건이 그렇듯 좋은 삶이라는 건 수치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로리와 영양 정보만 보고 그날의 식사 메뉴를 고르지 않는다. 식사, 즉 ‘먹는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영양소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일이며, 거기에는 일종의 정서적 에너지까지 포함되어 있는 까닭이다. 매순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좋고 바람직한 것을 선택하면 그것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나와 내 삶을 만든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건강이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정보 과잉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증폭시킬 뿐이다.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티쏘의 PRC 100 솔라

백 번 양보해서 스마트 워치가 아름다운 물건이고,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그걸 착용하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다) 꼭 필요한 기능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배터리다. 전자 제품 특성상 스마트 워치는 지속적으로 충전을 해줘야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지속적으로 배터리 관리를 해줘야 하는 것인데, 노트북·스마트폰·에어팟(이건 나 같은 글 쓰는 노동자에게 필수품이라 절대 버릴 수 없다!)까지, 이미 내 삶에는 배터리를 관리해야 할 전자 제품이 넘쳐난다. 여기에 스마트 워치까지 추가하고 싶지는 않다. 쿼츠 시계는 적어도 2~3년 정도는 배터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모델은 10년 이상 작동하기도 한다. 기계식 시계는 멈췄을 때 태엽만 다시 감아주면 된다. 사실 멈춰도 상관없다. 시간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미 그 물건의 이야기와 기계적인 구조, 그리고 오브제 자체의 미학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 워치는 배터리가 방전되면 어떤 가치도 제공할 수 없는 그저 고장난 물건일 뿐이다. 착용하는 목적이 처음부터 ‘기능’이기 때문에 그 도구적 가치가 사라지는 순간, 그것을 착용해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충전을 해줘야 한다는 것은 내 삶에서 관리해야 할 물건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것 역시 삶의 일부분을 점유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워치메이커 커트 클라우스가 등장하는 IWC의 광고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지속적으로 충전을 해줘야 한다는 것은 내 삶에서 관리해야 할 물건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가장 큰 문제는 스마트 워치로 인해 불특정 정보들이 ‘허가 없이’ 내 삶 속으로 침범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주의집중과 시간을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요한 하리는 자신의 저서에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빠른 속도와 멀티태스킹, 그리고 테크 기업들의 교묘한 비즈니스 모델 때문이다. 누군가의 관심이 돈이 되는 시대다. 거대 SNS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당신의 시선과 주의를 자신들의 앱에 더 머물게 할지 고민한다. SNS의 모든 인터페이스와 디자인, 시스템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그 정점이 이른바 ‘숏폼’이다. 이건 뇌의 도파민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면서 우리를 SNS 안에 무한히 가둬놓는다. 과거 PC 시절에도 IT 기업들은 우리의 주의집중을 집요하게 노렸다. 하지만 PC의 물리적인 한계, 크고 무거워서 24시간 들고다닐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우리의 삶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외부에서 우리는 잠시 접속을 끊고 혼자 혹은 함께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사람들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장치와 물리적 거리를 두기 어려워졌다. 스마트폰은 주머니와 가방에 늘 존재하고, 우리에게 뭔가를 울리고 알릴 준비를 하고 있다. 메시지가 도착할 때마다 마치 충격적인 소식이라도 접한 듯 부르르 몸을 떤다.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벨 소리가 울리면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이 간다. (이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삼성 기본 벨소리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그렇게 폰을 확인하면서 휘발되어 버린다. 확인한 김에 유튜브 앱이라도 열었다가는 숏폼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거대 기업의 기술과 데이터는 인간의 의지력 너머에 있다. 그들은 우리의 본능과 습성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스마트 워치는 스마트폰보다 더 짧은 거리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24시간 감시 중이다. 미세한 진동으로 꼼꼼하게 정보를 푸시하기 때문에 실수로 놓칠 일도 없다. 각종 메시지, 광고, 알림이 내 시간을 빼앗기 위해 달려든다. 스마트 워치가 스마트폰을 꺼낼 필요 없게 만들어준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마트 워치 때문에 우리는 스마트폰과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시간’을 알려주는 ‘워치’가 외려 ‘시간’을 빼앗아가는 모순. 그건 시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발생한다.

‘시간’을 알려주는 ‘워치’가 외려 ‘시간’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수렵 채집 사회에 머물러 있다

안데르스 한센, <인스타 브레인>

<인스타 브레인>의 저자 안데르스 한센은 “하루에 2600번 핸드폰을 만지는 동안 우리 뇌의 회로가 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자신의 역사 중 99.9%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수렵 채집인’이었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100이라고 하면 농경과 문명의 시간은 고작 0.1%이고, 산업사회 이후는 0.01%, 그리고 디지털 이후의 시대는 0.001%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 진화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뇌는 농경과 문명 이후의 시간에 이제 막 도달했을 뿐이다. 그래서 육체는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사회에 있지만 안타깝게도 뇌는 우리가 아직도 사바나 초원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뇌는 우리가 여전히 수렵 채집 활동을 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모든 신체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예를 들어 수렵 채집 시기에는 당분을 얻기 어려웠고, 우리는 단것이 보이면 많이 먹어서 몸에 저장해두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뇌는 오늘날 인류가 설탕을 발명해서 온갖 음식에 뿌려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단것에 집착하고, 비만은 갈수록 증가한다. 

뇌의 도파민 역시 마찬가지다. 수렵 채집 시절에 도파민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도파민은 어떤 행위에 동기를 부여해서 계속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의 스마트폰은 마치 설탕처럼 필요 이상의 도파민을 제공하고 있다. 자극은 점점 무뎌지고 뇌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파민 시스템은 붕괴되고 평범한 것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아직도 수렵 채집 시대에 사는 우리의 뇌는 달라진 현재의 디지털 환경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뇌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이는 우울증, 집중력 저하 등으로 이어진다. 스마트폰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발명되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디지털과 물리적 거리두기

<인스타 브레인>에서 저자는 ‘디지털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 수칙’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가장 앞에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자명종 시계와 손목시계를 구입하라’는 지침이다. 이 조언의 핵심은 필요 없는 기능까지 스마트폰에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저자는 스마트폰 사용을 줄일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 핵심은 스마트폰이 물리적 혹은 심리적으로 내 삶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스마트폰이 시야에 보이지 않도록 책상 안에 넣어두라는 것. 

스마트 워치는 이 조언과 완전히 상충되는 물건이다. 즉 스마트폰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강제하는 장치다. 라이프사이클을 24시간 모니터링하면서 끊임없는 푸시와 알림을 손목에 전달한다. 스마트 워치는 휴대폰을 떼어놓을 수 없도록 만들고, 우리는 알림이 올 때마다 집중력을 빼앗긴다. 사실 집중의 순간으로 진입하는 데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히 알림이 1초 동안 울리고, 2초 정도 그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3초만 손해봤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림이 울리는 순간, 당신이 어떤 일을 수행하면서 집중했던 시간이 함께 깨지는 것이고, 다시 그 순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다시 투입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알림이 실은 엄청난 시간을 빼앗아가는 셈이다. 간단한 알림도 이러한데, 수많은 영상과 숏폼까지 언제든 우리 삶에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의식하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잠식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우리는 알림이 올 때마다 집중력을 빼앗긴다. ⓒ The Wall Street Journal

시계, 빼앗긴 시간을 되찾는 도구

앞서 ‘자명종 시계와 손목시계를 구입하라’는 안데르스 한센의 조언은 간단하지만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는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오늘날 IT 제품은 24시간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다. 일단은 디바이스와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내 팔목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곳에 시계를 걸어두면 적어도 스마트 워치가 점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양팔에 착용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 또한 미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나처럼 기계식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스마트 워치가 팔목을 점유하면 일반 시계를 착용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다. 

당신의 팔목에 있는 것이 기계식이든 쿼츠든, 파텍필립이든 지샥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스마트 워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손목에서 스마트 워치를 벗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스마트폰과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아예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다. 언제나 그렇듯 도구에게는 잘못이 없다. 모든 책임은 도구가 아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몫이다. 오늘날 손목시계의 존재 의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되찾고 지키는 데 있다. 스마트 워치를 벗는 간단한 행위가 당신의 빼앗긴 시간과 집중력을 되찾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스마트 워치를 벗는 간단한 행위가 당신의 빼앗긴 시간과 집중력을 되찾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로그인하거나 가입하여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 0
  •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