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언제나 ‘올해의 시계’를 묻는 질문이 쏟아진다. 가장 화제가 된 시계, 가장 많이 팔린 시계, 가장 비싼 시계. 하지만 여기서 한발 물러나서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2025년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클로카가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해이자, 시계 시장 전반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신제품이 쏟아진 한해였다. 메이저부터 독립 시계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정말 유난히 넓고 다채로웠다. 그래서 이번 연말 결산에서는 최고를 가리는 대신, 조금 더 편안하게 세 명의 에디터가 각자의 취향으로 고른 시계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저 ‘올해 가장 마음이 갔던 시계’, ‘지금 다시 봐도 설레는 시계’를 솔직하게 골랐다. 현실적으로 가격대가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우리 같은 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시계를 고르라는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2025년을 마무리하며 스타일별로 고전적인 클래식, 현대적인 컨템포러리, 미래지향적인 아방가르드 세 가지 스타일로 나눠서 선정했다.
드레스 워치로 대표되는 클래식은 과거를 반복하는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정직하게 ‘시간’이라는 개념을 마주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내고, 뛰어난 비례와 여백, 다이얼 위의 작은 디테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때문에 클래식 워치는 빠르게 유행을 타지 않는다. 대신 착용자의 삶에 스며들며,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더욱 큰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만큼 브랜드의 태도와 완성도를 더욱 신중하게 판단해볼 수 있는 시계다.
김도우 <파르미지아니 토릭 콴티엠 퍼페추얼>
Parmigiani Toric Quantieme Perpetuel Ref. PFH952-2010002-300181
사실 클래식의 정석은 심플 드레스 워치 아닌가. 주제를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고전적인 시계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올해 파르미지아니는 복잡 시계의 대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퍼페추얼 캘린더를 심플하게 디자인했다. 실물에서 풍겨 나오는 우아함과 절제의 미. 그리고 예상치 못한 컬러까지. 이런 컴플리케이션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로즈골드에 골든 아워 다이얼이 더 취향이지만, 플래티넘에 모닝 블루 다이얼이 지금도 훨씬 기억에 남는다.
이재섭 <레더러 CIC 39 롱기튜드>
Lederer CIC 39 Longitude Ref. CIC 9016.60.710
시간을 표시하는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이를 구현하는 기술은 영리하고 비범하다. 수십 년간 조용히 시계를 제작해온 장인은 거의 모든 제품을 직접 제작하며 시계를 탄생시켰다. 시계 제작의 위대한 장인들과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스토리도 인상적이다.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지금 가장 가지고 싶은 시계. 화이트와 코발트 블루 두 가지 모델이 출시됐는데 역시나 원픽은 화이트.
이상우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트리뷰트 지오그래픽>
Jaeger-LeCoultre Reverso Tribute Geographic Ref. Q714845J
사각 시계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리베르소는 언젠가 꼭 들이고 싶은 드레스 워치다. 가장 좋아하는 모델은 리베르소 트리뷰트 크로노그래프인데, 올해 그에 필적할 만한 또 하나의 시계가 등장했다. 리베르소 트리뷰트 지오그래픽은 회전식 케이스 뒷면에 월드타이머 디스플레이를 넣었다. 다이얼 없이 케이스 자체를 캔버스로 활용했다는 게 킥이다. 세계지도는 래커를 채워서 완성했는데, 이 정도면 양산형 메티에 다르 워치 수준. 다이얼 앞면의 빅 데이트 기능과 깊이 있는 래커 블루 다이얼도 마음에 든다. 뒷면 오픈 워크 착용까지 고려하면 여전히 크로노그래프 모델이 1순위지만 앞면만 착용한다면 이걸 고를 듯.
컨템포러리는 현대적이라는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간단하게 브레이슬릿을 갖춘 모델이나 다이버 워치처럼 스포티한 올라운더 스타일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결국 지금의 라이프스타일과 감각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올해의 트렌드는 어느 정도 명확하다. 스포츠와 드레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인에, 소재와 컬러에서 더욱 과감해졌다. 게다가 경쟁이 더욱 과열되며 이 시계를 왜 지금 만들어야 하는 심도 있는 질문에 저마다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김도우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퍼페추얼 캘린더 >
Audemars Piguet Royal Oak Perpetual Calendar Ref. 26674ST.OO.1320ST.01
내가 로열 오크를 좋아하긴 하나보다. RD#5와 고민했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는 꿈같은 모델이라, 조금 더 현실적인 퍼페추얼 캘린더를 선택했다. 애초에 로열 오크는 네 개의 서브다이얼과 팔각 베젤의 균형이랄까, 디자인적인 궁합이 꽤나 좋다. 게다가 조정 버튼 없이 크라운 포지션만으로 모든 달력을 직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신형 무브먼트는 정말 굉장하다. 사이즈는 38mm 버전이 끌리지만, 디자인은 다이얼 외곽에 주를 표시하는 플랜지가 있는 41mm 버전이 훨씬 멋지고 균형감도 좋아 보인다. 고르고 보니 클래식에 이어서 내년에는 뭐든 간에 퍼페추얼 캘린더를 구입해야만 할 것 같다.
이재섭 <롤렉스 랜드-드웰러>
Rolex Land-Dweller Ref. 127236
롤렉스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랜드-드웰러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파격적인 시도다. 실리콘 기술의 선구자이지만 도입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롤렉스는 다이나펄스 이스케이프먼트로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이 시계가 대량 생산된다는 사실은 롤렉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현재 라인업에서는 36mm 플래티넘 모델이 가장 좋다.
이상우 <파네라이 루미노르 벤티친퀘>
Panerai Luminor Venticinque Ref. PAM02025
‘벤티친퀘(25)’라는 이름처럼 파네리스티 25주년을 기념하는 시계로, 라디오미르 컬렉션에 있던 매트 블루 다이얼과 브루니토 스틸을 루미노르 컬렉션에 적용했다.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마음에 드는 이유는 줄질 편한 루미노르 컬렉션에서 이 조합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돔 글라스에 골드 핸즈는 빈티지 마리나 밀리타레 모델에서 사용하던 디자인이라 더욱 특별하다. 크라운 가드의 레버는 반대로 열리도록 디자인했고, 파네리스티 각인도 새겼다. 이렇게 사소한 이유로 컬렉터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파네라이의 무서운 점이 아닐까.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호불호를 동반한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든 혁신적인 구조이든 언제나 새로움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존재니까. 아마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시계는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모델을 골라도 단순히 특이한 시계는 아닐 것이다. 시간을 표시하는 방식, 무브먼트의 구조, 시계를 착용하는 감각 자체가 다시 생각할 만한 시계가 아닐까.
김도우 <우르베르크 X 율리스 나르당 UR-프릭>
Urwerk X Ulysse Nardin UR-FREAK
믿기지 않는 협업 모델이다. 기나긴 시계 역사에서도 독보적인 각자의 시스템을 하나로 합쳐내다니, 기술적으로도 이게 되나 싶은 수준. 요즘 유행을 생각하면 케이스가 다소 크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다이얼 속에서 무브먼트가 회전하고, 그 속에서 새틀라이트 타임 디스플레이가 또 회전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준다. 실제로는 워낙 천천히 움직이기에 그리 다이내믹해지는 않겠지만, 내 손목 위에 있다면 베젤을 정말 열심히 돌려볼 것 같다(시간 조정을 크라운 없이 베젤로 한다).
이재섭 <브레게 익스페리멘털 1>
Breguet Expérimentale 1 Ref. E001BH/S9/5ZV
2025년의 늦자락에 등장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석을 이용해 일정한 동력을 고속 회전하는 투르비용에 전달한다는 미증유의 개념은 시계 제작의 진정한 혁신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브레게 홀마크를 통해 안정성과 성능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브레게 창립 250주년의 끝과 익스페리멘털 컬렉션의 시작이라는 서사도 완벽하다.
이상우 <불가리 × MB&F 세르펜티>
Bulgari × MB&F Serpenti
불가리와 MB&F가 불가리의 아이콘 세르펜티를 재해석했다. 기존의 세르펜티가 뱀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클래식하게 표현했다면, 이번 협업 모델은 MB&F 특유의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이 가미된 로봇 뱀에 가깝다.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워치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중을 납득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 시계는 ‘세르펜티’라는 아이콘에 뿌리에 두고 있어서 설득력이 충분하다. 2025년 뱀의 해를 기념하는 시계라는 측면에서도 단연 최고다. 내가 뱀띠라서 더 마음에 드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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