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Clear
검색하기

회중시계는 살아있다

왜 다시 회중시계에 주목하는가?

  • 이재섭
  • 2026.06.12
SNS Share
  • Facebook
  • X
  • Kakao
https://www.klocca.com/article/%ed%9a%8c%ec%a4%91%ec%8b%9c%ea%b3%84%eb%8a%94-%ec%82%b4%ec%95%84%ec%9e%88%eb%8b%a4/
복사
회중시계는 살아있다

지난 5월 오데마 피게와 스와치의 로열 팝이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달아오른 것이 비단 애호가뿐이었으랴. 온 천하의 얼리어답터와 되팔렘이 일제히 봉기해 로열 팝 열풍에 가세했다. 티저가 발표되고 나서도 사람들은 로열 팝에 대해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온라인에는 수많은 렌더링과 추측이 난무했다. 시간이 흐르고 제품 정보가 정식으로 공개되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목시계가 아니라 회중시계(또는 회중시계 스타일)였기 때문이다. 

오데마 피게 X 스와치 로열 팝.

기계식 시계는 태엽을 이용해 얻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원시적인(?) 물건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잘 맞는 것도 아니다. 21세기에 이토록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물건을 좋아하다니! 얄궂은 조롱을 일삼는 기계식 시계 무용론자들이 이해는 간다. 여기서 굴하지 않고 좀 더 나아가면 회중시계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무려 한 세기 전에 손목시계에게 밀려난 회중시계는 고대 유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헌데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회중시계가 죽지도 않고 돌아온다. 그렇다면 오늘날 회중시계는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또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 걸까? 단순히 뉴트로나 노스탤지어 마케팅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회중시계는 손목시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극한의 엔지니어링을 추구하기 위한 야심이나 흔하디 흔한 마케팅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술적 해방을 위한 캔버스

대부분의 손목시계는 지름 40mm, 두께 10mm 내외의 케이스로 제작한다. 이보다 엄청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없다. 매우 엄격한 공간적 제약을 받는 셈이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싶은 이들에게 손목시계라는 캔버스는 성에 차지 않는다. 도전이라는 도파민에 중독된 이들은 기술적 해방을 가로막는 물리적 족쇄를 풀어내기 위해 회중시계라는 플랫폼으로 눈을 돌린다. 

오데마 피게 150 헤리티지 포켓 워치.

케이스백에 내장된 유니버설 캘린더는 무브먼트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계산한다. 기어의 맞물림만으로 전세계 주요 종교 및 문화권의 축제일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를 표시한다.

오데마 피게는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며 회중시계를 선보였다. 150 헤리티지 포켓 워치(150 Heritage Pocket Watch)라고 명명한 이 시계는 현대 고급 시계의 정점이다. 오데마 피게는 2023년에 소개한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유니버셀의 칼리버 1000를 회중시계에 맞춰 완전히 재구성했다. 무려 1,099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칼리버 1150은 30개의 컴플리케이션을 포함해 도합 47개의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는 슈퍼소네리, 울트라씬, 준그레고리력(semi-gregorian) 퍼페추얼 캘린더처럼 메종이 쌓아 올린 기술적 혁신이 포함됐다. 

바쉐론 콘스탄틴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은 그레고리력을 비롯해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중국 음력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을 갖췄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변칙적인 중국 음력의 알고리즘을 계산하기 위해 전용 모듈을 개발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일찍이 Ref. 57260을 통해 기계식 시계의 한계를 넘었다. 수백 년간 갈고 닦은 기술력을 한데 모은 Ref. 57260은 2,800개가 넘는 부품과 242개의 주얼을 이용해 57개의 기능을 구현했다. Ref. 57260이 기록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라는 타이틀은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The Berkley Grand Complication)이 가져갔다.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은 개발에만 11년이 소요됐으며, 워치메이커들은 1년간 조립에만 매달렸을 만큼 장대한 프로젝트였다.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은 Ref. 57260과 크기는 동일하지만 메커니즘과 부품의 수 그리고 기능이 상이하다. 부품은 고작 51개 증가했지만 기능은 57개에서 63개로 늘어날 정도로 밀도가 높아졌다.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의 핵심은 스위스 시계 산업이 그간 축적해온 기술을 바탕으로 동양의 세계관과 역법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식 시계로 표현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융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예 예술의 장

오늘날 회중시계는 고급 시계의 핵심 가치로 여겨지는 장인 정신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무대로 여겨진다. 가용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한 손목시계와 달리 회중시계는 다이얼은 물론이고 케이스 전체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미지아니 라 라베날.

깨지기 쉬운 오팔과 제이드를 얇은 두께로 자르고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장인의 섬세한 솜씨가 요구된다.

파르미지아니의 라 라베날(La Ravenale)은 1920년대에 생산된 미닛 리피터 무브먼트를 복원한 제품이다. 창립자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이 시계는 여행자의 야자수 혹은 여인초라고 불리는 부채파초(Ravenala madagascariensis)에서 영감을 얻었다. 다이얼과 무브먼트 그리고 케이스에는 부채파초 모양의 패턴을 핸드 인그레이빙으로 빼곡히 새겼다. 케이스백은 나무 대신 오팔과 제이드를 이용해 마케트리 기법으로 장식했다. 회중시계를 걸기 위한 체인도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체인 제작 명인 로랑 졸리에가 만든 화이트 골드 체인은 사용자와 회중시계, 과거의 유산과 현대의 시계 제작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링크 하나하나를 가공하고 마감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기에 체인 하나를 제작하는데 100시간이 넘게 걸린다. 

루이 비통 에스칼 오 몽 후지 포켓 위치.

다이얼에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바늘이 없다. 시침과 분침은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뒷면에 장착했다. 케이스 측면에 있는 레버를 누르면 미닛 리피터와 오토마통이 활성화된다.

시계 제작에 대한 루이 비통의 진지한 접근은 에스칼 오 몽 후지 포켓 위치(Escale au Mont Fuji pocket wat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행지와 문화에서 영감을 얻는 에스칼 오투르 뒤 몽드 컬렉션이기에 일본의 명소인 후지산을 배경으로 삼았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다이얼은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과 후지산을 묘사했다. 

그랑 푀 & 미니어처 에나멜, 샹르베(Champlevé), 파이요네(Paillonné) 기법으로 화사한 파스텔톤 분위기를 연출한 다이얼은 40회가 넘는 소성 과정을 거친다. 에나멜링을 덧칠하고 고온의 가마에 수차례 넣었다 빼며 굽는 과정은 고되고 지난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에나멜 다이얼은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 잔잔한 수면 위를 떠다니는 배에는 루이 비통의 트렁크 및 어망과 함께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에비스가 있다. 모든 조각은 라 파브리끄 뒤 떵 루이 비통의 마스터 인그레이버들이 맞춤 제작한 전용 도구를 이용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헤리티지의 증명

손목시계의 역사는 고작 100여년에 불과하다. 그 이전까지 기계식 시계는 회중시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오랜 역사를 지닌 브랜드는 과거의 영광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념비적인 회중시계를 선보인다. 손목시계의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전부터 시계를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을 회중시계에 투영하는 것이다. 

브레게 클래식 그랑 소네리 메티에 다르 1905.

2025년 브레게는 창립 250주년을 기념하는 시계를 쏟아냈다. 그 중에는 회중시계도 있었다. 브레게가 회중시계를 출시한 것은 몽트르 드 포셰 1907 이후 약 20여년만이었다. 클래식 그랑 소네리 메티에 다르 1905(The Classique Grande Sonnerie Métiers d’Art 1905)는 공 스프링, 충격 흡수 장치, 브레게 밸런스 스프링, 투르비용과 같은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발명을 통해 브랜드의 유산을 깊이 파헤치고 조명한다. 

전면 덮개에는 센 강과 퀘드올로지 거리를 에나멜링과 인그레이빙으로 정교하게 재현했다. 이로써 사용자는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시대로 돌아간다.

힌지로 연결된 전면 덮개를 열면 퀘드올로지 패턴과 화이트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을 볼 수 있다. 블루 드 프랑스 컬러로 PVD 코팅 처리한 해머와 투르비용 브리지가 연출하는 색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해머를 전면에서 드러낸 것은 소유자에게 감상의 즐거움과 색다른 경험을 주기 위함이다. 이 시계에는 예술적 기교뿐만 아니라 현대 시계 제작의 놀라운 기술적 성취까지 담겨 있다. 자성을 이용한 마그네틱 레귤레이터는 소네리와 미닛 리피터의 리듬을 정확하게 조절한다. 자성을 아군으로 회유하는 전략은 브레게가 몇몇 시계를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마그네틱 레귤레이터는 물리적 접촉이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차이밍 기능을 작동했을 때 소음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파텍 필립 데스크 클락 Ref. 958G-001. 공식 명칭은 데스크 클락이다. 칼라트라바 크로스 문양으로 장식한 커버를 이용해 탁상시계처럼 사용할 수 있다.

탁상시계와 회중시계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파텍 필립은 노틸러스 50주년 기념 모델 가운데 하나를 회중시계로 선보였다. 최초의 노틸러스 데스크 클락 Ref. 958G-001는 회중시계와 탁상시계로 활용할 수 있다. 노틸러스의 아이코닉한 케이스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이 시계는 지름이 50.65mm나 되는 화이트 골드 케이스로 만들었다. 가로로 패턴을 넣은 특유의 블루 다이얼에는 인덱스를 대신하는 13개의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칼라트라바 Ref. 5328G에 탑재했던 칼리버 31-505 8J PS IRM CI J은 8일 파워리저브를 비롯해 날짜 및 요일 기능을 갖췄다. 아름다운 칼리버 23-300를 보는 듯한 다섯 개의 브리지 디자인은 고전적이고 우아하다.  

현대적 감성을 지닌 오브제

오늘날 회중시계는 현대적인 감성을 담아내는 럭셔리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라이프 스타일, 문화, 공간을 아우르는 현대적 예술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전통적인 소재에서 벗어나거나 형태를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블로 MP-16 아샴 드로플릿.

원클릭 시스템을 활용해 티타늄 체인을 손쉽게 연결하거나 분리할 수 있다. 펜던트로 활용하기 위한 긴 체인과 회중시계처럼 착용하기 위한 짧은 체인을 함께 제공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인 협업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는 위블로는 미국의 아티스트이자 브랜드 앰버서더 다니엘 아샴과 함께 MP-16 아샴 드로플릿(MP-16 Arsham Droplet)을 제작했다. 전통적인 회중시계를 현대 미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MP-16 아샴 드로플릿은 회중시계를 비롯해 펜던트와 탁상시계로도 활용할 수 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물방울 모양의 비대칭 케이스는 5등급 티타늄으로 제작했다. 매끄러운 케이스는 시계를 손에 쥐었을 때를 고려해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했다. 전면과 후면을 덮은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는 케이스의 곡선에 맞춰 복잡한 각도로 가공했다. 촉감을 자극하기 위해 케이스 측면에는 아샴 그린 컬러의 고무를 덧댔다. 

로열 팝이 손목시계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사용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과 관습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팝 아트 스타일로 서브컬처적 감성과 미학을 강조한 로열 팝(Royal Pop)은 유아독존의 길을 걷고 있는 오데마 피게와 스위스 시계의 상징과도 같은 스와치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회중시계의 형식을 빌린 로열 팝은 시계 제작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유쾌한 도발을 통해 대중문화와 파인 워치메이킹의 화학적 융합을 이끌어냈다. 8개의 제품 가운데 6개는 초침이 없는 레핀 스타일, 나머지 2개는 크라운과 스몰 세컨즈가 직각을 이루는 사보네트 스타일이다. 레핀 스타일은 회중시계, 펜던트, 탁상시계로 활용할 수 있다. 심지어 키링처럼 가방에도 걸 수 있다. 정확한 의중은 알 수 없으나 사보네트 스타일은 서드 파티 아이템을 활용해 손목시계로도 활용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아마도 로열 팝은 역사상 가장 쿨한 회중시계로 회자될 듯하다. 

크리스토퍼 와드 X 스튜디오 언더독 얼라이언스 02 포켓 워치.

손목시계가 헤게모니를 거머쥔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회중시계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의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지금 회중시계가 탁월한 마케팅 재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철 지난 회중시계가 현대 시계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지켜보자. 

로그인하거나 가입하여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 0
  •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