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턴(Hamilton)의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Khaki Field Mechanical 36mm)이 오는 5월 20일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미 38mm와 42mm 모델이 있는 상황에서 크기가 다른 모델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최근 들어 시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36mm는 많은 남성들이 부담스럽게 느낄만한 수치다. 커서 부담이 아니라 작아서 부담인 게다. 시계가 작으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존재감이 뿜뿜하는 시계에 익숙하다면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크기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이 시계를 판단하는 기준은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디테일의 밀도여야 한다.
해밀턴은 본디 미국의 시계 제조사였다.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서 문을 연 해밀턴은 레일로드 포켓 워치로 입지를 다졌다. 당시 미국은 대량 생산 체제를 바탕으로 한 물량 공세로 스위스 시계 산업을 위협했다. 해밀턴은 뛰어난 성능을 바탕으로 월썸이나 엘진 등과 함께 미국 시계를 상징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미국은 해밀턴에 군용 시계를 의뢰했다. 미군의 군수품 공급 업체로 임명된 해밀턴은 1917년에 처음으로 손목시계를 납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민간용 시계 제작을 중단한 채 전사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군용 시계 생산에 매진했다. 해밀턴은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손목시계와 마린 크로노미터를 포함해 백만 개가 넘는 시계를 납품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 육-해군으로부터 “E” 어워드를 수상했다(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부가 전시 물자 생산에 기여한 민간 기업에 수여했던 상. E는 엑설런스를 의미한다). 그것도 5번씩이나. 해밀턴은 베트남 전쟁이 터졌을 때에도 밀스펙을 충족하는 군용 시계를 납품하며 미군을 지원했다.
카키 필드 메카니컬은 해밀턴의 군사적 유산이 오롯이 새겨진 시계다. 뛰어난 가독성,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인 디자인, 준수한 성능과 견고함은 카키 필드 메카니컬의 뿌리가 툴 워치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 역시 이러한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생김새만 본다면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을 38mm나 42mm 모델의 축소판으로 넘겨 짚을 수 있지만 이 시계에는 기존 모델에는 없던 흥미로운 서사가 담겨 있다.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은 해밀턴이 과거 미 공군을 위해 제작했던 FAPD 5101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계다. FAPD 5101 또는 타입 1 내비게이터 워치(Type 1 Navigator Watch)로 불린 원작은 해밀턴의 아카이브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FAPD 5101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생산됐다. 미 공군에 지급된 GG-W-113이나 보급형 MIL-W-46374과 달리 수량이 극히 적었다. FAPD 5101은 GG-W-113과 뿌리는 같지만 사양이 약간 달랐다(주: FAPD는 Federal Aviation Procurement Division의 약자로 연방 항공 조달처를, 5101은 분류 코드를 의미한다).
FAPD 5101은 에어 포스 내비게이터(Air Force navigators, 공군 항해사)를 위한 시계였다. 항법을 담당하는 항해사의 주된 임무는 선박 또는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GPS 및 전자 시스템의 도입으로 폐지되거나 조종사의 역할로 통합됐지만 FAPD 5101이 제작됐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항해사는 조종사와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중요한 보직이었다. FAPD 5101은 명료한 디자인의 다이얼과 신뢰할 수 있는 무브먼트를 갖췄다. FAPD 5101의 케이스 지름은 36mm로 당시 제작된 일반 시계는 물론이고 군용 시계(34mm)보다 컸다. 가독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는 케이스를 크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케이스는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파커라이즈 마감 처리했다. 내부에는 핸드와인딩 칼리버 684가 들어 있었다. 칼리버 684는 17개의 보석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용 시계에 탑재한 무브먼트 중에서도 사양이 높았다. 신속한 항법 계산과 시간 동기화에 유리한 스톱 세컨즈 기능을 갖춘 칼리버 684는 오직 FAPD 5101에만 쓰였을 뿐 해밀턴의 다른 어떤 시계에도 사용된 적이 없다. 이처럼 특별한 FAPD 5101을 계승하는 시계가 바로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인 것이다.
본 제품의 지름은 36mm로 가장 작지만 두께는 10.2mm로 38mm 모델보다 약간 더 두껍다. 이는 후술할 유리 때문으로 보인다. 무광 샌드블라스트 마감한 케이스는 38mm나 42mm 모델보다 색이 환하고 질감이 곱다. 실제로 만졌을 때도 촉감이 더 부드럽다. 빛 반사로 인한 위치 노출을 막는다는 본래의 취지는 무색해졌지만 상처가 나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 장점은 유효하다. 조작감을 높이기 위해 홈을 새긴 크라운은 비율이 적당하다. 베젤은 폭이 얇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은 크기를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케이스백에는 미국의 건국 250주년을 기념하는 문구와 함께 2026년에만 한정 생산된다는 안내가 적혀 있다. 생산량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조바심이 나게 만드는 위협적인 내용이다. 그 밑으로는 방수 성능, 생산지 등 시계와 관련된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글자로 뒤덮인 케이스백은 옛 군용 시계를 연상시킨다(주: 촬영 제품은 샘플이어서 문구가 다를 수 있다). 방수 성능은 38mm나 42mm 모델과 달리 100m로 향상됐다. 덩치는 작아졌지만 더 다부지다.
특이한 점은 케이스와 스트랩을 이어주는 바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프링 바가 아니어서 러그 바깥 쪽에 구멍이 없다. 과거 군인들이 작전이나 훈련을 수행하는 도중에 스트랩이 어딘 가에 걸려 스프링 바가 파손되거나 이탈해 시계가 추락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군용 시계는 바를 케이스에 고정시켰다. 즉,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의 고정 바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한 디테일이다. 대신 단점도 있다. 스트랩 교체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오직 나토 스트랩만 사용할 수 있다. 나토 스트랩을 기피하는 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아니다. OEM 스트랩보다 잘 어울리는 대안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러그 폭은 18mm로 무난하다.
유리의 소재는 사파이어 크리스털이 아닌 아크릴 글라스다. 아크릴 글라스는 현대 시계의 문법에서 보자면 철저한 감성의 영역이다. 특유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생기는 왜곡은 빈티지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다만, 아크릴 글라스는 사파이어 크리스털만큼 단단하지 않아서 약한 충격에도 쉽게 긁힌다. 이를 보완하고자 지문 방지 및 하드 코팅 처리를 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아크릴 글라스로 인해 케이스는 두꺼워졌지만 사용자는 색다른 경험과 감각이라는 보상을 얻는다.
24시간을 표시한 매트 블랙 다이얼은 군용 시계의 클리셰와 같다. 주사기 모양의 바늘과 미닛 트랙의 삼각형 마커에는 익어버린 트리튬을 재현한 베이지색 슈퍼루미노바를 칠했다. 어두운 환경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군용 시계의 덕목이다. 크기가 작아져 다이얼은 오밀조밀하게 바뀌었다. 38mm나 42mm 모델과의 차이점은 로고다. 옆으로 누운 빈티지 로고는 아메리칸 클래식이나 카키 에비에이션 같은 빈티지 스타일, 레트로 워치에 주로 쓰이는데 카키 필드 메카니컬에서는 처음 본다.
무브먼트는 38mm나 42mm 모델과 동일한 핸드와인딩 칼리버 H-50을 채택했다. ETA 2801을 기반으로 제작한 칼리버 H-50은 시간당 진동수를 21,600vph(3Hz)으로 낮추면서 파워리저브를 80시간으로 늘렸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크라운을 뽑으면 작동이 멈추는 해킹 세컨즈 기능이 있다. 티타늄 합금의 니바크론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해 자성에도 충분히 대응하고 있다. 자성과 먼지를 막아주는 더스트 커버도 사용했다. 카키 필드 메카니컬 38mm과 다르게 플라스틱이 아닌 금속 소재의 무브먼트 고정 링을 사용했다. 무브먼트에서도 FAPD 5101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FAPD 5101의 칼리버 684는 ETA 2391을 개량한 엔진이다. ETA 2391은 H-50(ETA 2801)의 전신에 해당하는 무브먼트다. FAPD 5101과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 모두 핸드와인딩 그것도 ETA가 만든 무브먼트를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해밀턴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의 가격은 106만원이다. 38mm 나토 스트랩 모델이 93만원. 42mm 나토 스트랩 모델이 110만원이니 대충 중간 값이다. 이 같은 가격 책정은 케이스 제조 방식이나 가공의 차이 등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해밀턴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은 미국에서만 판매되는 미국 한정 모델도 따로 출시된다. 해당 모델은 1,776개만 한정 생산되며, 케이스백에 리미티드 에디션에 관한 문구가 추가된다. 아울러 소가죽 스트랩을 추가로 제공한다. 참고로 일본 한정 모델도 있다.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은 현대적 필드 워치의 본보기를 보여주면서도 충실한 고증을 통해 원작의 구수함까지 맛깔스럽게 재현해냈다. 작은 크기 안에 내용물이 꽉 들어찬 이 시계는 다른 어떤 카키 필드보다도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군용 시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품은 밀리터리 마니아는 물론이고 좋은 가격에 훌륭한 품질을 지닌 정통 기계식 시계를 찾는 애호가들에게도 카키 필드 메카니컬 36mm은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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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름 :
- 36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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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께 :
- 10.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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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
- 스테인리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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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
- 아크릴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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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 :
- 1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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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랩 / 브레이슬릿 :
- 카키 나토 스트랩, 스테인리스 스틸 핀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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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얼 :
-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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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먼트 :
- H-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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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식 :
- 핸드와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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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 :
- 시, 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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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당 진동수 :
- 21,600vph(3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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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리저브 :
- 8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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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
- 10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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