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르미지아니(Parmigiani)의 토릭 프티 세컨드(Toric Petite Seconde)는 워치스 앤 원더스 2024에서 가장 마음에 든 시계 중 하나였다. 값비싼 시계를 자주 보는 터라 부지불식간에 무감각해진 나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려줬다고 해야 할까? 무릇 고급 시계라면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파르미지아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토릭(Toric)의 귀환이 반가웠다.
파르미지아니는 불가리에서 20여년을 보낸 귀도 테레니(Guido Terreni)가 합류한 2021년부터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신임 CEO가 부임하기 전까지 파르미지아니는 한동안 방향타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었다. 파르미지아니가 수직 통합 체계를 구축한 매뉴팩처이자 고급 시계 브랜드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고루했고, 조금은 독선적으로 느껴졌다. 귀도 테레니는 정체된 브랜드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정체성을 주입했다. 고급 시계의 가치와 본질을 절제된 미학으로 풀어내는 것이 전략의 골자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창립자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정신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부흥의 첨병은 톤다 PF였다. 원래 톤다는 드레스 워치였지만 톤다 PF로 진화하면서 드레스 워치와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입체적인 시계로 변모했다. 톤다 PF의 성공으로 파르미지아니는 브랜드 정비에 필요한 추진력을 확보했고, 이는 토릭의 복귀로 이어졌다. 토릭 프티 세컨드에는 옛 토릭의 흔적이 약간은 남아 있지만 연속성은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나는 토릭 프티 세컨드가 달라진 파르미지아니의 새로운 컬렉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오리지널 토릭의 계승이라기 보다는 리부트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지금의 토릭은 톤다 PF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절제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토릭 프티 세컨드는 시, 분, 초라는 기본적인 기능만 갖춘 시계다. 하지만 케이스, 다이얼, 무브먼트를 모두 금으로 만들며 진부한 전개에서 벗어났다. 바늘이 3개뿐인 심플 워치가 특별한 건 이 때문이다. 케이스가 금인 시계는 흔하다. 금으로 만든 다이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많지 않다. 무브먼트의 소재가 금인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생김새는 단순할지라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토릭에 담긴 파르미지아니의 지론인 듯하다.
토릭 프티 세컨드는 분명 드레스 워치를 표방하지만 독특한 색상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디자인 때문인지 드레스 워치 특유의 엄숙함이나 딱딱함은 덜하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케이스 지름이 40.6mm에 두께가 8.8mm여서 드레스 워치의 범주 안에 있지만 크기가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다. 토릭 프티 세컨드가 진중함과 경쾌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수트 셋업 보다는 캐주얼한 재킷이나 니트 혹은 가벼운 셔츠 차림에 로퍼나 스니커즈를 신고 착용하면 더 어울릴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나는 얌전한 폴로 셔츠를 입고 시계를 착용했는데 하찮은 안목으로 고른 복장에도 제법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파르미지아니가 제안하는 드레스 워치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케이스는 중간이 넓고 베젤과 케이스백으로 향할수록 폭이 좁아지게 가공했다. 크기가 넉넉한 편이기에 러그는 짧게 가져갔다. 파르미지아니의 시그니처인 널링 베젤과 산봉우리처럼 가운데가 솟은 굴곡진 글라스백을 이용해 케이스를 조약돌 형태로 빚어냈다. 케이스를 구성하는 3개의 덩어리는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데 부분과 전체가 질서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케이스백을 고정하는 4개의 나사는 머리에는 직선으로 된 홈 대신 동그란 구멍이 2개가 있는데 그 말인 즉 케이스백을 열고 닫기 위해서는 특수 제작한 드라이버가 필요하다는 거다. 배타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다이얼에는 그 흔한 스위스 메이드 문구조차 없다. 오직 로고 장식과 바늘 그리고 인덱스만 남아 있을 뿐.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과감하게 덜어냈다. 덧셈 보다는 뺄셈, 채움 보다는 덜어냄으로 미학에 접근한 파르미지아니의 방식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로고 장식, 바늘, 아플리케 인덱스, 다이얼은 모두 금으로 제작했다. 단, 바삐 움직이는 초침은 무게를 고려해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었다. 스몰 세컨즈 다이얼에서도 글자나 기호는 찾아볼 수 없다. 인덱스의 역할을 대신하는 구멍을 4개 파낸 게 전부다. 다이얼 끝 부분은 경사지게 만들었는데, 케이스 안으로 다이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파르미지아니에 의하면 베벨링 처리한 다이얼은 시계의 유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옛 시계의 두툼한 플렉시 글라스가 떠올랐는데 평평한 다이얼과 비교하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다이얼 제작에는 그레나주(Grenage)라는 고전적인 기법을 동원했다. 주석산 크림(Tartar Cream)과 바다 소금 그리고 은을 섞어 곱게 간 혼합물을 탈염수와 배합해 작업하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이렇게 준비한 아말감(Amalgam)을 다이얼 표면에 적당히 펴 바른 뒤 특수한 솔을 이용해 원을 그리며 다이얼을 문지른다. 작업은 햇빛이 닿지 않는 약간 어두운 곳에서 진행한다. 준비물에 들어간 은의 감광성 때문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털이 단단한 솔을 쓰지만 이후에는 미세하고 부드러운 털이 달린 솔로 바꾼다. 이제 막 손을 댄 다이얼의 색은 납처럼 어둡지만 점차 밝고 하얗게 변해간다. 솔질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손끝에 저항이 느껴지는데 미세한 입자들이 다이얼 표면을 촘촘하게 메우고 덮었다는 신호다. 곡물에서 유래한 그레나주라는 단어는 이처럼 미세한 입자가 쌓여 만들어낸 고은 질감에서 비롯했다.
다이얼 색상은 샌드 골드(Sand Gold)와 그레이 셀라돈(Grey Celadon)으로 나뉜다. 샌드 골드는 일반적인 새먼 다이얼보다 채도가 약간 낮다. 회록색인 그레이 셀라돈은 고려 청자의 색과 유사하다. 샌드 골드와 그레이 셀라돈 둘 다 복고적 색채가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레스 워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토릭의 방향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핸드와인딩 칼리버 PF780은 플레이트와 브리지를 18K 로즈 골드로 만들었다. 오늘날 금으로 제작한 무브먼트를 양산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라면 파르미지아니와 F.P. 주른, 브레게, 베르네롱이 떠오른다. 금은 통상 무브먼트 부품의 소재로 쓰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황동보다 물러서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게다가 변색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무브먼트 제작에 금을 쓴 것은 독자적인 생산 시설과 가공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방증이자 파르미지아니가 설정한 고급 시계의 기준이 매우 높음을 의미한다.
무브먼트의 레이아웃은 단순함과 대칭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과 절제미를 표현하기 위해 2개의 배럴과 레귤레이팅 기관만 노출시켰다. 페를라주 대신 샌드블라스트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플레이트도 그러한 기조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배럴을 고정하는 콕과 밸런스 브리지는 골드가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했으며, 거울처럼 반짝이게 블랙 폴리싱 마감했다. 앵글라주와 내각의 처리도 준수하다.
브리지 표면에는 일반적인 코트 드 제네브(Côtes de Genève) 대신 코트 드 플러리에(Côtes de Fleurier) 문양으로 장식했다. 오래된 기요셰 머신으로 정밀하게 작업한 브리지는 전통 기법이 오늘날에도 특별한 영감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상단 브리지에는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서명과 함께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다. 단순히 이름을 새기는 게 아니라 핀 버클과 동일한 방식으로 로고를 처리한 것에서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두 브리지의 모서리는 기계로 가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의 흔적이 짙게 남은 배럴 콕이나 밸런스 브리지와 대조된다. 베벨링한 부분을 확대해보면 마무리가 살짝 거친데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하기 어렵다. 다소 아쉬운 부분이나 판매용 제품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밸런스는 프리스프렁 방식이다. 밸런스 휠의 안쪽에는 무게 중심을 조절해 오차를 보정하는 4개의 동그란 추가 달려 있다. 이론적으로는 밸런스 휠이 회전 운동을 할 때 공기 저항이 적을수록 좋다. 크라운을 뽑았을 때 초침이 멈추는 스톱 세컨즈 기능은 없다. 초 단위로 시간을 맞추고 싶은 이들에게는 감점의 요인이겠지만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다.
크기가 작은 2개의 배럴은 직렬로 연결되어 있다. 왼쪽 배럴 위에는 래칫 휠이 있는 반면 오른쪽 배럴에는 래칫 휠이 없다. 대칭 효과를 위해 배럴 뚜껑에 래칫 휠과 같은 마감을 적용한 것이다. 오른쪽 배럴은 왼쪽 배럴의 톱니 드럼(toothed drum)에 맞물린다. 배럴에서 방출한 에너지는 피니언을 거쳐 기어트레인으로 전달된다. 직렬 방식은 배럴이 하나씩 풀린다. 한쪽 배럴의 메인스프링이 다 풀려갈 때 나머지 배럴의 메인스프링이 풀리며 토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완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의 배럴을 사용하는 것보다 파워리저브를 늘리면서도 동력을 어느 정도 균일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직렬 구조의 또 다른 이점은 토크를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부하가 적어 부품의 마모를 줄이고 시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
누벅 처리한 앨리게이터 악어 가죽 스트랩은 맞춤 제작한 수트와 닮았다. 스트랩 하나를 완성하는데 이틀 정도 소요되며, 모든 과정은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손바느질에만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기계를 이용하면 3분이면 끝난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복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스트랩을 이탈리아어로 손바느질을 뜻하는 푼토 아 마노(punto a mano) 기법으로 완성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푼토 아 마노는 겉에서 보면 바늘땀이 듬성듬성 보인다. 작은 바늘땀(1mm) 사이에 4mm 정도 되는 빈 틈이 있다. 안쪽은 반대로 긴 바늘땀 사이에 작은 틈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CEO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듯한데 스트랩 하나에도 완벽을 기하는 파르미지아니의 진심 어린 자세와 어느 시계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전해진다.
케이스와 같은 소재로 제작한 핀 버클에는 파르미지아니의 새로운 로고를 양각으로 장식했다. 옆에서 본 핀 버클의 모양은 톤다 PF의 러그를 빼 닮았다. 토릭의 모든 시계는 핀 버클만 선택할 수 있는데 이는 파르미지아니의 철학과 토릭의 디자인 및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 폴딩 버클은 고전적인 드레스 워치를 추종하는(현대적인 터치를 가미하긴 했지만) 토릭의 감성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토릭 프티 세컨드를 착용하는 것은 멋진 옷을 몸에 걸치는 것만 같았다. 수트를 차려 입으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고 행동거지가 신중해지듯 손목 위에 토릭 프티 세컨드를 올리니 자꾸만 주변을 의식하게 됐다. 귀금속 케이스이다 보니 묵직하면서도 기분 좋은 감촉이 손목을 지긋이 압박했다. 스트랩 안쪽을 가죽으로 덧댄 것도 훌륭한 착용감에 일조했다. 빈틈없이 재단한 토릭을 손목에 꼭 맞게 착용하기 위해서는 폴딩 버클보다는 핀 버클이 나아 보인다. 토릭 컬렉션에 핀 버클만 쓰는 파르미지아니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와인딩을 하는 감각은 시계의 전반적인 무드 마냥 부드럽다. 저항이 조금만 더 억세다면 좋았을 것이다. 작은 배럴과 짧은 메인스프링을 사용했기 때문에 토크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크라운을 돌려 시간을 맞출 때는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다.
토릭 프티 세컨드의 가격은 로즈 골드 모델이 47,000스위스프랑(한화 약 8,180만원), 플래티넘 모델이 54,000스위스프랑(한화 약 9,400만원)이다. 2025년 9월 16일 기준 금 값이 1트로이온스당 3,719달러, 플래티넘이 1트로이온스당 1,417달러이니 금이 플래티넘보다 약 2.6배 정도 비싸다. 플래티넘은 고급 시계 시장에서 가장 고귀한 소재로 통하지만 시세를 감안하면 로즈 골드 모델을 구매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파르미지아니의 시계에서 동양의 선(禪)과 서양의 미니멀리즘을 엿보았다. 본질에 대한 탐구와 극도로 절제된 형태가 빚어낸 축소지향의 시계. 그게 바로 지금의 파르미지아니 그리고 토릭 프티 세컨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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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름 :
- 40.6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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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께 :
- 8.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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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
- 로즈 골드 또는 플래티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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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
- 사파이어 크리스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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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 :
-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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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랩 / 브레이슬릿 :
- 앨리게이터 악어가죽 스트랩, 로즈 골드 또는 플래티넘 핀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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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얼 :
- 샌드 골드(로즈 골드), 그레이 셀라돈(플래티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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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먼트 :
- PF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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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식 :
- 핸드와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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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 :
- 시, 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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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당 진동수 :
- 28,800vph(4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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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리저브 :
- 6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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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
- 47,000스위스프랑(로즈 골드), 54,000스위스프랑(플래티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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