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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 헤리티지 디렉터 스테판 벨몽 인터뷰

메종의 가치와 철학을 말하다

  • 이재섭
  • 20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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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locca.com/article/%ec%98%88%ea%b1%b0-%eb%a5%b4%ec%bf%a8%ed%8a%b8%eb%a5%b4-%ed%97%a4%eb%a6%ac%ed%8b%b0%ec%a7%80-%eb%94%94%eb%a0%89%ed%84%b0-%ec%8a%a4%ed%85%8c%ed%8c%90-%eb%b2%a8%eb%aa%bd-%ec%9d%b8%ed%84%b0%eb%b7%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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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 헤리티지 디렉터 스테판 벨몽 인터뷰
Jaeger-LeCoultre Director of Heritage Stéphane Belmont Interview

지난 9월 서울의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서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의 헤리티지 디렉터 스테판 벨몽(Stéphane Belmont)을 만났다. 1992년 IWC에 입사해 시계 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1999년 예거 르쿨트르로 자리를 옮긴 뒤 지금까지 마케팅, 제품 개발 및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메종의 발전을 이끌었다. 미중년의 정석 같았던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의 역할과 메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터뷰는 정확성을 위해 편집 및 요약됐다. 

1999년에 예거 르쿨트르에 입사했는데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

당시에도 핵심은 리베르소(Reverso)였다. 리베르소 탄생 60주년인 1991년부터 약 10년간은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담은 리베르소를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리베르소 듀오페이스(Reverso Duoface)나 리베르소 듀에토(Reverso Duetto)도 선보였다. 1998년에는 리베르소 그랑 스포트(Reverso Gran Sport)도 출시했다. 그랑 스포트는 스포티한 리베르소였다. 곡선을 활용한 디자인과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통해 스포티한 성격을 부여했다. 

마스터 컨트롤(Master Control)이나 메모복스(Memovox), 그랑 레베이(Grand Réveil)도 점점 인기를 끌었다. 퍼페추얼 캘린더를 결합한 메모복스나 지오그래픽(Geographic), 울트라-씬 퍼페추얼 캘린더 같은 모델도 있었다. 예거 르쿨트르의 아이코닉 워치인 메모복스나 지오그래픽에 파워리저브,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 같은 고전적인 기능을 담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의 예거 르쿨트르는 보다 클래식한 브랜드였다. 그래서 그랑 스포트를 통해 스포츠 세그먼트로 조금씩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더 큰 리베르소를 만들려고 했던 건가?

크기를 키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단지 메탈 브레이슬릿을 장착한 것뿐이었다. 스포티하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2000년대부터 파네라이 같은 시계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커다란 시계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면서 예거 르쿨트르는 여성 시계처럼 작은 시계나 만드는 브랜드로 인식되곤 했다. 결국 우리는 더 큰 시계를 개발해야 한다는 엄청난 도전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시계를 크게 만드는 과정은 어땠나?

그야말로 난관이었다. 리베르소 그랑 스포트조차 파네라이처럼 커다란 시계와 나란히 있으면 여성 시계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커다란 시계의 득세로 인해 리베르소 그랑 스포트는 시장에서 사라졌고, 예거 르쿨트르는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어쩔 수 없이 워치메이커에게 더 큰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당시 가장 큰 마스터 컨트롤의 케이스 지름은 41.5mm였는데 43mm로 키우고 싶었다. 가장 큰 리베르소는 세로가 42mm 정도였는데 리베르소도 더 크게 만들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큰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큰 무브먼트가 필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커다란 케이스에 작은 무브먼트를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워치메이커는 소형화에 특화된 사람이다. 작은 시계를 만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 그들에게 큰 시계를 만들자고 하면 그들은 왜 큰 시계를 만들려고 하냐고 되묻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더 커진 케이스에 맞는 새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해야 했다. 물론 개발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는 모두가 시계를 작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웃음). 소형화야말로 예거 르쿨트르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거 르쿨트르의 매뉴팩처에 간 적이 있는데 무브먼트와 시계를 모아놓은 헤리티지 갤러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기록과 유산을 정리하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예거 르쿨트르의 모든 것을 간직한 헤리티지 갤러리.

  • 헤리티지 갤러리의 아카이브 보관소.

  • 헤리티지 갤러리에 전시된 다양한 애트모스.

워낙 많은 시계와 자료가 쌓여 있어서 예거 르쿨트르가 어떤 브랜드인지 명확하게 알리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공개하면 관람객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람이 끝났을 때에는 ‘도대체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시계에 집중하기로 했다. 과거의 시계 중에서 현재의 컬렉션과 관련이 깊은 것을 골라냈다. 가지고 있는 전부를 보여주기 보다는 예거 르쿨트르가 어떤 브랜드인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를 선별해 전시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헤리티지 갤러리를 방문하면 아카이브가 방대하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는 예거 르쿨트르가 다른 시계 제조사보다 훨씬 더 많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하나 또는 두 개의 성공적인 컬렉션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예거 르쿨트르는 폴라리스, 마스터 컨트롤, 듀오미터, 리베스로, 랑데부, 칼리버 101, 애트모스 등 많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상하이에서 <드림 셰이퍼(The Dream Shaper)> 전시회를 열었는데 행사를 준비하면서 모르는 시계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놀라워했다. 

예거 르쿨트르는 풍부한 역사와 상징적인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어떤 철학이 있나?

나의 역할은 예거 르쿨트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메종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회사에 합류했을 때 예거 르쿨트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시계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예거 르쿨트르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시계를 만들지 않는다. 성능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예거 르쿨트르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투르비용을 예로 들어보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투르비용을 발명한 뒤로 약 200년 동안 매우 적은 투르비용 시계가 생산됐다.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나 쓰였을 뿐 고객에게 판매된 투르비용 시계는 극히 적었다. 빈티지 시계 중에서도 투르비용은 찾기가 어렵다. 이는 손목 시계에 적합한 투르비용을 제작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투르비용을 소형화하고 움직이게 만들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커다란 배럴이 있는 단순한 시계보다 정확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1993년에 출시한 리베르소 투르비용.

1993년에 출시한 리베르소 투르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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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가 투르비용 손목 시계를 처음 제작한 것은 1993년이다. 쿼츠 시계로 인한 위기가 어느 정도 지나간 뒤 수집가들은 아름다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밀함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지 않았다. 훨씬 더 정밀한 쿼츠 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했던 건 멋진 컴플리케이션을 넣은 작은 기계식 시계였다. 그래서 예거 르쿨트르는 리베르소 투르비용(Reverso Tourbillon)을 제작했다. 아름다운 시계였지만 정밀함 측면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현대적인 투르비용을 목표로 제작한 마스터 투르비용.

두 번째 투르비용 손목 시계는 13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등장했다. 예거 르쿨트르는 마스터 투르비용(Master Tourbillon)을 제작하기에 앞서 일반적인 시계보다 훨씬 더 정밀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때를 기점으로 단순히 멋진 컴플리케이션을 넘어 정밀함까지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티타늄으로 투르비용 케이지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티타늄은 가볍기 때문에 투르비용을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충분한 에너지를 이용해 진동수를 높이고, 보다 정밀한 투르비용을 제작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예거 르쿨트르의 사고방식이다. 단지 멋있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장치와 기능이 뛰어난 성능을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아름다움을 위한 요소도 물론 있다. 언제나 심미성과 성능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예거 르쿨트르의 철학이다. 

 

헤리티지 디렉터는 어떤 방식으로 제품 개발에 관여하나?

나는 제품 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을 교육하고, 예거 르쿨트르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예거 르쿨트르가 단순히 아름다운 시계만 만드는 게 아니라 최고의 성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알린다. 즉, 회사의 문화를 전파하고, 과거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 예거 르쿨트르가 어떤 브랜드인지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어떤 시계를 디자인하거나 해결책을 찾으라고 지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물론 너무 과거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헤리티지 디렉터의 입장에서 바라본 리베르소는 어떤 시계인가?

스테판 벨몽이 착용한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페이스 캘린더

예거 르쿨트르는 워치메이커의 워치메이커(The watchmaker of watchmakers)로 알려져 있다. 컴플리케이션, 울트라-씬처럼 기술적으로 뛰어난 무브먼트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예거 르쿨트르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디자인은 항상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가치였다. 예거 르쿨트르 시계의 핵심은 디자인이다. 리베르소는 디자인과 기능의 결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품이다. 사각형 시계는 스트랩이나 브레이슬릿과의 조화를 고려해 디자인한다. 그래서 실제로 착용했을 때 더 우아해 보인다. 1990년대부터 예거 르쿨트르는 레베르소에 맞는 컴플리케이션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전적이고 우아한 리베르소에 고급스럽고 복잡한 기능을 담을 수 있게 됐다. 나에게 리베르소는 멋진 디자인과 아름다운 컴플리케이션을 모두 갖춘 시계다. 

최근 몇 년간 많은 브랜드들이 인증 중고(CPO)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CPO가 아닌 컬렉터블(The collectibles)이라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컬렉터블을 시행하는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가?

CPO는 비교적 최근에 출시한 시계를 다룬다. 반면에 컬렉터블은 생산된 지 30년이 넘은 역사적인 시계에 주목한다. 헤리티지 갤러리에 전시되지 않았지만 수집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시계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수집가들과 협력해 흥미로운 시계를 탐색하고, 그 시계를 한데 모아 사람들에게 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예거 르쿨트르의 빈티지 시계를 보다 수월하게 모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목적도 있다. 

컬렉터블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인 빈티지 메모복스.

컬렉터블 컬렉션 대한 정보를 담은 컬렉터블 서적.

무엇이든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유럽에서 판매한 수많은 시계를 비롯해 미국에서 르쿨트르라는 이름으로 팔린 시계도 있다. 디자인도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시계가 희소성이 있고, 디자인이나 기능적으로 더 흥미로운지 혼자서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컬렉터블(The collectibles)이라는 책을 만든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컬렉터블 프로그램과 책을 통해 사람들은 예거 르쿨트르의 풍부한 유산과 과거에 대해 알 수 있다. 컬렉터블은 모든 시계를 다루지는 않는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시계를 대상으로 한다. 

일반 소비자가 빈티지 시계의 복원을 요청할 수도 있나?

물론이다. 예거 르쿨트르는 모든 고객에게 복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마 예거 르쿨트르는 19세기 혹은 20세기 초에 생산된 시계를 포함해 어떤 종류의 시계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제조사일 것이다. 모든 무브먼트를 직접 생산했고, 여전히 부품을 재고로 보유하고 있기에 언제든 복원이 가능하다. 부품이 소진돼도 괜찮다. 도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면에는 수치나 공차처럼 부품과 관련된 정보가 담겨 있다. 그래서 당시와 똑같은 방식으로 부품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부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가 진정한 매뉴팩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헤리티지 갤러리 내에 있는 복원 부서.

정확하다. 정보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복원 부서는 헤리티지 갤러리 내에 배치했다. 워치메이커들은 필요한 정보를 바로 열람할 수 있다. 고객이 복원을 요청한 시계를 수령하면 시계가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디자인이나 다이얼이 원래의 것이 맞는지를 확인한다. 확인이 끝나면 고객에게 원래대로 복원할 지 아니면, 현재 상태를 유지할 지 묻는다. 고객에게 먼저 제안하고 고객의 의사에 따라 복원 작업을 진행한다. 

수년간 예거 르쿨트르는 리베르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시도한 것이 인상적이다. 일반적인 원형 시계보다 사각형 시계를 디자인하거나 컴플리케이션을 추가할 때 더 많은 제약이 있나?

사각형 시계는 원형 시계보다 훨씬 더 제작하기 어렵다. 만약, 그 사각형 시계가 뒤집어지는 구조라면 더 어려워진다. 원형 시계보다 공간이 적기 때문에 기능을 추가하는 것도 어렵다. 사각형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여러 기능을 알맞은 위치에 배치해야 한다. 

1931년에 제작한 리베르소.

투르비용을 예로 들어보자. 아까도 투르비용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기능도 마찬가지다. 보통 투르비용 시계에서 투르비용은 앞이나 뒤에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예거 르쿨트르는 어느 쪽에서나 투르비용을 감상할 수 있는 리베르소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양면 투르비용인 셈이다. 전통적인 컴플리케이션을 재창조해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소형화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을 재창조하고, 사각형 시계에 맞춰 완벽하게 디자인하는 예거 르쿨트르의 능력을 보여준다.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도 사각 시계에서 구현하기 더 까다롭나?

그렇다. 에나멜 다이얼을 가진 시계들은 거의 대부분 원형이다. 다이얼이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나멜 작업은 둥근 형태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각형 안에서 에나멜을 다루는 건 상당히 어렵다. 모서리를 날카롭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나멜 다이얼의 모서리는 갈라지거나 깨질 위험이 높다. 사각형 다이얼을 에나멜로 작업하는 장인들은 미니어처 예술에 통달한 것은 물론이고 뛰어난 예술적 감각까지 지녔다. 이는 사각형 다이얼에 에나멜을 몇 겹으로 칠하는 기술을 완벽하게 숙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통 에나멜 다이얼은 케이스와 유리로부터 보호받는다. 하지만 리베르소의 경우 케이스백에 에나멜 작업을 하면 외부에 노출된다. 그래서 노출된 에나멜을 보호하는 별도의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깨끗한 배경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5~6겹의 반투명 에나멜을 덧입혀 에나멜을 보호하는 일종의 보호막을 만든다. 이 작업은 난이도가 매우 높다. 투명한 에나멜을 고온에서 구울 때 미세한 기포가 표면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흰색 배경이라면 기포를 터트려 없애거나 다른 색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투명한 에나멜은 기포가 하나라도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한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투명 에나멜 작업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를 요구한다. 

리베르소 원 프레셔스 플라워.

에나멜로 작업한 다이얼을 보면 미세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허나 리베르소는 외부에 노출되는 만큼 조금이라도 울퉁불퉁해서는 안 된다. 에나멜이 케이스에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도록 보석을 세공하듯 연마하고 광택을 내는 작업이 뒤따른다. 이렇게 하면 에나멜의 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에나멜이 케이스에 꼭 들어맞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한쪽 면에만 에나멜 작업을 하면 굽는 과정에서 케이스가 구부러질 수 있다. 그래서 거의 같은 양의 에나멜을 이용해 케이스 안쪽에도 작업을 한다. 물론 안쪽에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단지 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화려한 예술 작업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기술이 숨어 있다. 

지오피직이나 마스터 컴프레서 같은 모델이 그립다. 새로운 컬렉션의 론칭이나 기존 컬렉션의 확장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는 컬렉션을 늘릴 계획이 없다. 기존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예산이 다른 브랜드만큼 크지도 않다. 주어진 예산으로 기존 제품을 홍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기존 컬렉션의 틀 안에서 작업하면서도 지오피직이나 마스터 컴프레서 같은 시계의 요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마스터 컨트롤이나 폴라리스 같은 기존 컬렉션에 기술적인 요소를 추가하거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세련되게 만드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예전의 컬렉션을 다시 내놓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그렇게 하려면 기존 컬렉션 가운데 일부를 없애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컬렉션을 없애야 할까? 내 생각에 현재의 컬렉션은 모두 훌륭하다. 나도 지오피직을 정말 좋아하고, 마스터 컴프레서의 열렬한 팬이지만 당장 새로운 컬렉션을 론칭할 계획은 없다. 

예거 르쿨트르에서 근무하는 동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잊지 못할 순간이 많지만 리베르소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도는 리베르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 나라다(주: 인도에 주둔하며 폴로를 즐기던 영국 장교들은 경기 중에도 파손되지 않을 만큼 견고한 시계를 원했다. 스위스의 사업가 세자르 드 트레이는 이를 르쿨트르의 자크 다비드 르쿨트르에게 알렸고, 자크 다비드 르쿨트르는 케이스를 회전시켜 유리와 다이얼을 보호할 수 있는 리베르소를 개발했다). 인도를 돌아다니며 인도에 주둔했던 영국 장교들의 흔적과 연결고리를 느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리베르소의 기원으로 돌아간 것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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