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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워치메이커의 마지막 여행

세상의 모든 GMT 워치는 모리츠 그로스만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 이상우
  • 20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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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워치메이커의 마지막 여행

당신은 ‘MG’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미디어에 정기적으로 노출된 평범한 사람이라면 새마을금고가 떠오를 것이고, ‘건덕후’라면 반다이의 프라모델 마스터 그레이드가 생각날 거다. 만약 당신이 시계애호가라면 앞으로 ‘MG’라는 이니셜을 들었을 때 이 단어를 떠올리면 좋겠다. 모리츠 그로스만(Moritz Grossmann)이라는, 19세기 독일 워치메이커의 이름을.

모리츠 그로스만의 탄생과 부활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은 182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워치메이킹 훈련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한 뒤 1854년 글라슈테에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다. 모리츠 그로스만은 글라슈테 지역의 워치메이커를 위해 정밀 선반을 개발했으며, 레버 이스케이프먼트와 피벗 부품의 최적화에 집중하며 포켓 워치와 마린 크로노미터 생산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시계 제작뿐만 아니라 시계 이론 분야에도 해박했는데, 수업, 강연, 저술, 번역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866년 그의 논문 ‘분리된 레버 이스케이프먼트에 관하여(On the detached lever escapement)는 영국 시계연구소에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보여 1878년 글라슈테에 독일 최초의 시계학교(Deutsche Uhrmacherschule Glashütte)를 설립했다.

  • 모리츠 그로스만이 제작한 포켓 워치

  • 모리츠 그로스만을 재건한 크리스틴 후터

1885년 그가 라이프치히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유니버설자이트 워치는 바로 이때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의 회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2008년 워치메이커 출신 여성사업가 크리스틴 후터(Christine Hutter)가 모리츠 그로스만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획득하며 브랜드를 재건했다. 그리고 2010년 첫 시계 베누(BENU)를 선보이며 마침내 부활에 성공했다. 현재 모리츠 그리스만은 연간 500개 이하의 시계만 생산하며, 독일 글라슈테 지역의 전통적인 기술과 미학을 이어가고 있다. 

유니버설자이트, 너로 정했다!

제품 리뷰에 앞서 모리츠 그로스만의 여러 시계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간 생산량이 매우 적은 브랜드라서 실물을 만져보기조차 쉽지 않은데, 입맛대로 골라서 리뷰를 할 수 있다니! 쇼케이스 행사를 위해 꽤 많은 샘플 제품이 한국을 방문한 덕분이다. 흔치 않은 기회라 꽤 고민이 되었는데, 고심 끝에 내가 고른 모델은 지구본이 그려진 ‘유니버설 자이트(Universalzeit)’였다. 샘플 중에는 올해 신제품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2022년에 출시된 모델을 골랐다. 특이한 컴플리케이션이 탑재되어서 흥미가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할 말이 좀 있어야 원고 분량 뽑아내기도 편할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모리츠 그로스만 유니버설자이트

고백하건데, 첫인상은 그리 큰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스틸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높은 몸값을 자랑했고, 몸집도 드레스 워치치고는 다소 큰 편이었다. 물론 고풍스런 무브먼트가 매력적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시계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메커니즘을 하나씩 조작해보면서 어느새 가격표에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유니버설자이트는 내가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독특한 세미-월드타이머 워치는 GMT 시계가 처음 태동했던 역사적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제 시간을 140여 년 전으로 잠시 되돌려보자. 만약 당신이 유니버설자이트를 갖고 있다면 10시 방향 푸셔를 시침이 거꾸로 점핑하도록 세팅하고 대략 122만 6,400번 정도 누르면 되겠다.

유니버설자이트는 내가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워치메이커의 짧은 여행

1885년 1월 어느 겨울날.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은 아침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라이프치히 중앙역 카이저홀에서 열리는 폴리테크닉 학회. 그곳에서 그는 ‘세계시와 시민 생활 입문(Universal Time and the Introduction to Civilian Lif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기술적, 실용적 측면에서 세계표준시(Universal Time)와 현지 시간(Local Time)의 공존 방안을 제시하고, 오늘날 GMT 워치의 표준을 확립한 선구적인 논문이었다. 

 

  • 1894년 당시 독일 워치메이커의 캘린더 수첩

  • 수첩에 적힌 다양한 로컬 타임

모리츠 그로스만이 라이프치히로 떠나기 3개월 전. 1884년 10월, 워싱턴 D.C.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International Meridian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0월 13일 그리니치 경선을 본초 자오선(Prime meridian)으로 공식 채택했다. 마침내 세계표준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태양시를 기준으로 자신만의 시간대를 살아갔다. 낮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태양이 머리 위에 가장 높게 뜨는 시간을 정오로 정했다. 따라서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태양정오시’가 존재했고, 모든 마을이나 도시가 자기만의 현지 시간을 사용했다.

하지만 장거리 교통이 발달하면서 여러 지역이 같은 시간을 공유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대륙횡단열차를 안전하고 정확하게 운행하려면 단일 표준시가 반드시 필요했다. 최초의 표준시 역시 철길 위에서 태동했다. 1879년 캐나다의 철도 엔지니어 샌포드 플레밍은 전 세계를 24개의 구역을 나눈 표준시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다. 그는 표준 시간대를 정한 뒤 지구의 경도와 시간을 연결하고, 24시간 체계를 도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결과 1883년 11월 미국과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철도 시간을 통일했고, 1884년 10월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본초 자오선이 결정되었다. 

  • 표준시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샌포드 플레밍

  • 1884년 국제 자오선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

모리츠 그로스만, GMT 워치의 근간을 세우다

세계표준시라는 개념 자체는 샌포드 플레밍이 제안했지만, 이를 현실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시계공학적 해법을 제시한 것은 워치메이커 모리츠 그로스만이었다. 그는 1885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강연에서 세계시 도입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륙을 이동하는 여행에서 서로 다른 현지 시간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설명했다. 당시 강연에서 그는 세계 시간이 현지 시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각 도시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현지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워치메이커였던 그는 새로운 시간 체계를 시계공학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핵심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시계 다이얼에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바늘을 추가해 현지 시간과 세계 시간의 차이를 읽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GMT 워치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모리츠 그로스만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1885년 1월 23일 강연을 마친 그는 갑자기 쓰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GMT 워치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를 고안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구현하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40년이 흘러 2022년, 그의 이름과 세계지도를 다이얼에 표시한 GMT 워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7개의 시간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모리츠 그로스만의 유니버설자이트다. 이 시계에는 세계 시간과 현지 시간의 조화를 추구했던 모리츠 그로스만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독창적인 메커니즘으로 구현되어 있다. 

다이얼의 세계지도와 디지털 방식으로 표현한 7개 도시의 시간

이 시계에는 모리츠 그로스만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독창적인 메커니즘으로 구현되어 있다.
호텔 로비에서 느끼는 여행의 설렘

호텔 로비에 가면 세계 주요 도시 이름이 적힌 여러 벽시계를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에게 그곳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낯선 나라에 도착한 여행자는 오랜 비행으로 몹시 지쳐 있는 상태다. 깨끗한 호텔 로비에 짐을 내려놓고 시차를 확인하면서, 여러 도시의 서로 다른 시간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이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자연스럽게 ‘호텔 로비의 시계’와 ‘여행’은 어느 순간 심리적으로 서로 연결된다. 음악, 그림, 음식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과 감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내가 유니버설자이트를 처음 봤을 때 본능적으로 여행의 설렘을 느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 시계는 여러 도시 이름이 적힌 호텔 로비 시계의 완벽한 축소판이었고, 나를 어느 먼 나라의 호텔 로비로 순간이동시켰다. 이건 분명 일반적인 월드타이머에서는 느낄 수 없던 특별한 감각이다.

  • 세계 주요 도시의 이름이 적힌 호텔 로비의 벽시계

로비에서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시계를 가만히 살펴본다. 케이스 지름은 44.5mm다. 드레스 워치 스타일이지만 꽤 큼직하다. 세계지도 위에 7개의 시간을 모두 담아내려면 이 정도의 공간은 필요했을 것 같다. 옛 회중시계와 마린 크로노미터 시대의 기술을 현대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브랜드이니 회중시계를 축소한 손목시계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마치 IWC의 포르투기저의 큼직한 사이즈가 꽤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두께는 13.78mm인데, 이 또한 컴플리케이션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둥(pillar) 방식을 비롯한 모리츠 그로스만의 독특한 무브먼트 설계 철학 때문이다. 세상 모든 물건의 형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또 한 번 깨닫는다.

16.5mm 손목에 착용한 유니버설자이트

다이얼에는 전 세계 7개 지역의 시간을 동시에 표시하는데, 그 표현법이 일반적인 월드타이머와 전혀 다르다. 커다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주요 도시에 작은 창을 뚫어서 해당 지역을 시간을 보여준다. 24개 도시의 시간을 한눈에 볼 수는 없지만 대신 지도상 도시 위치에 시간을 바로 디지털 방식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직관적이다. 도시 이름을 찾거나 시차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지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든 시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모든 도시의 시간은 1시간마다 동시에 점핑하기 때문에 보는 맛이나 조작하는 맛이 좋다. 굳이 장르 분류를 하자면 점핑 아워 기능을 갖춘 세미-월드타이머 GMT 워치라고 하겠다. 오세아니아는 다이얼 공간에 여유가 없어서 생략되어 있다. 호주에서는 팔리기 어려운 시계일지도. 한반도가 시간 표시 창에 가려져 있다는 것도 대한민국 유저에게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대신 추가 비용을 내면 도시 이름을 ‘Tokyo’에서 ‘Seoul’로 변경해서 주문할 수 있다고 한다. 

점핑 아워 방식으로 보여주는 세계 시간

7개의 도시, 168개의 숫자

컬러 조합은 세계지도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깊은 바다 같은 블루 선버스트 다이얼에 화이트 라인으로 경도과 위도를 표현했고, 그 위에 새먼 컬러로 세계 지도를 올렸다. 가독성을 위해 대륙에는 특별한 디테일을 넣지 않고 주요 도시 이름만 적었는데, 시간이 표시되는 도시는 폰트 크기를 키워서 시간을 읽기 쉽도록 했다. 시간 표시 창 역시 화이트 배경에 블랙 컬러로 숫자를 표시해 가독성을 살렸다. 다이얼의 외곽에는 짧은 바 타입의 시간 인덱스와 챕터링을 배치했다. 인하우스에서 직접 제작한 핸즈는 우아하면서도 날카롭게 시간을 가른다.

블루 선버스트 다이얼과 새먼 컬러 세계지도

7개 도시의 시간은 24개 톱니가 있는 래칫 휠을 활용해 점핑 아워 방식으로 동시에 바뀐다. 다이얼 아래쪽에 커다란 원형 디스크가 있고, 이 단일 디스크에 각 도시별로 24개씩, 총 168개의 숫자를 절묘하게 위치·각도를 맞춰 프린팅했다. 6개 레이어로 전체 숫자를 15도 각도로 배열했다고 한다. 사실 7개의 숫자를 동시에 정확한 위치에 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데이트 창 하나만 표시할 때도 숫자가 미세하게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라. 

  • 점핑 아워 기능을 구현하는 래칫 휠

  • 168개의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시간 디스크

시간을 표시하는 7개의 도시가 조금 생뚱맞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뉴욕, 런던, 파리 같은 곳이 아니라 피닉스, 리우데자네이루, 케이프타운 같은 비주류 도시를 선택했기 때문. 이것도 이유가 있다. 1년 내내 정확한 시간을 표시할 수 있도록 서머타임(일광 절약 시간제)을 실시하지 않는 지역만 표시하도록 한 것. 참고로 미국에서 유일하게 서머타임을 실시하지 않는 곳이 피닉스가 있는 애리조나주, 그리고 하와이주다. 

7개의 숫자를 동시에 정확한 위치에 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진화한 GMT 메커니즘

보기와 달리 시간 세팅 방법은 간단하다. 3시 방향 크라운으로 7개 도시의 시간과 메인 핸즈를 동시에 설정할 수 있다. 먼저 지도를 보고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맞춰 시간을 세팅하면 나머지 도시의 시간도 그에 맞춰 정확하게 세팅된다(대한민국이라면 도쿄의 시간 창을 보고 맞추면 된다). 이후 10시 방향 크라운으로 시침을 현재 시간으로 설정하면 끝이다. 지역을 이동할 때는 10시 방향 크라운으로 시침을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는데, 작동 메커니즘이 범상치 않다. 크라운을 11시 방향으로 돌린 뒤 누르면 시침이 뒤쪽으로 점핑하고, 크라운을 9시 방향으로 놀린 뒤 누르면 시침이 앞쪽으로 점핑한다. 크라운이 중립 상태일 때는 푸셔를 작동할 수 없도록 설계해 의도치 않게 핸즈가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가독성이나 조작 방식 면에서 가장 진화한 GMT 워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세계 시간을 처음으로 시계공학에 접목했던 모리츠 그로스만의 이름을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 

시침을 조작할 수 있는 10시 방향 크라운 푸셔

정밀한 조작 메커니즘은 모리츠 그로스만이 오래 전부터 추구해왔던 설계 철학이기도 하다. 10시 방향 크라운은 물론, 3시 방향 크라운에도 정확한 시간 설정을 위한 모리츠 그로스만의 시그니처 기술이 접목되어 있다. 바로 클러치 와인딩 메커니즘이다. 일반적인 시계와 달리 유니버설자이트는 시간 설정을 위해 크라운을 당기면 초침은 멈추고 크라운은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 상태에서 크라운을 돌리면 시침이 움직인다. 시간을 세팅한 다음, 크라운 아래 쪽에 위치한 푸셔를 누르면 해킹이 해제되면서 초침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크라운을 원래 위치로 되돌릴 때 분침이 움직이는 등 오작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이 클러치 와인딩 메커니즘은 유니버설자이트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주요 모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작동을 차단하는 클러치 와인딩 메커니즘

시간을 거스르는 필러 무브먼트

필러 구조로 제작한 인하우스 칼리버 100.7

이런 모든 기능과 메커니즘은 인하우스 칼리버 100.7로 구동된다. 칼리버 100 기반의 이 무브먼트는 과거 글라슈테 지역의 워치메이킹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저먼 실버 소재를 사용한 무브먼트는 마치 옛 신전 건물처럼 두 개의 플레이트 사이에 기둥을 놓은 필러 구조다. 과거 마린 크로노미터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모리스 그로츠만의 헤리티지를 계승하는 무브먼트 설계다. 위쪽 플레이트가 무브먼트의 3/4를 가리도록 한 것 역시 글라슈테 워치 고유의 스타일이다. 랑에운트죄네 등 다른 글라슈테 지역 브랜드에 비해 보다 날 것에 가까운 투박한 느낌인데, 이것이야말로 모리츠 그로스만의 차별화 포인트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두께도 조금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밸런스 휠 콕과 이스케이프 휠 콕에 새긴 꽃무늬 패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무브먼트의 미학은 밸런스 휠 콕과 이스케이프 휠 콕에서 정점에 이른다. 두 개의 부품 전체에 꽃무늬 패턴을 수작업으로 인그레이빙했고, 밸런스 스프링의 유효 길이는 핀을 직접 조정하는 대신 콕을 가로지르는 마이크로미터 나사를 돌려서 조정할 수 있다. 물론 밸런스 휠에 부착된 스크루로 보다 정밀하게 관성 모멘트를 조정할 수도 있다. 이 ‘그로스만 밸런스 휠’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여 최소한의 질량으로 높은 운동에너지를 구현한다. 무엇보다 포켓 워치 무브먼트처럼 밸런스 휠 직경을 늘리면서 진동수를 18,800vph로 낮췄는데, 천천히 부드럽게 왕복 운동하는 밸런스 휠의 움직임에서 옛 시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투명한 인조 사파이어, 그리고 보라색 열처리 나사 역시 모리츠 그로스만 무브먼트의 특징 중 하나다. 

  • 저먼 실버로 제작한 3/4 플레이트

  • 스네일링 마감한 배럴과 보라색 나사

밸런스 휠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여 최소한의 질량으로 높은 운동에너지를 구현한다.
라이프치히, 1885년 겨울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GMT 워치는 아마도 롤렉스의 GMT-마스터 2일 것이다. 최초로 낮/밤이 구분된 24시간 회전 베젤을 탑재해 아이코닉 워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상징적인 모델은 GMT 워치라는 기본 토대 위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세계 최초로 제시한 모리츠 그로스만은 세상 모든 GMT 워치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이 시계의 단점으로 사이즈나 다이얼 중앙에 드러난 세 개의 나사를 언급한다. 허나 그건 이 시계의 역사적 상징성을 생각하면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 유일한 아쉬운 점을 묻는다면 다이얼의 지도에 ‘라이프치히(Leipzig)’가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적어도 유럽 지역에는 런던 대신 라이프치히를 넣어줬으면 좋겠다. 모리츠 그로스만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GMT 워치의 개념이 처음 탄생한 곳. 그곳이야말로 이 시계에 꼭 들어가야 할 도시가 아닐까.  

사진 촬영까지 끝내고 나는 시계를 반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니버설자이트를 손목에 올렸다. 다시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고풍스런 19세기 호텔이다. 그곳에서 나는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모리츠 그로스만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1885년 1월 23일 겨울 아침이었다.

나는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모리츠 그로스만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상세 정보
  • 지름 :
    44.5mm
  • 두께 :
    13.78mm
  • 케이스 소재 :
    스테인리스 스틸
  • 유리 :
    사파이어 크리스털
  • 방수 :
    30m
  • 스트랩 / 브레이슬릿 :
    브라운 악어가죽 스트랩, 스틸 핀 버클
  • 다이얼 :
    블루 선버스트 다이얼
  • 무브먼트 :
    칼리버 100.7
  • 방식 :
    매뉴얼 와인딩
  • 기능 :
    시, 분, 초, 7개 도시 시간 표시, GMT, 클러치 와인딩
  • 시간당 진동수 :
    18,000vph(2.5Hz)
  • 파워리저브 :
    42시간
  • 가격 :
    57,800유로(한화 약 9,000만 원)

Moritz Grossmann Universalzeit

https://www.grossmann-uhr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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