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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서 오브제로: 레페 1839 브랜드 스토리 1부

인문학의 눈으로 본 레페의 예술적 오브제

  • 이상우
  • 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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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서 오브제로: 레페 1839 브랜드 스토리 1부

“기억은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과거다” – 앙리 베르그송

응답하라, 카이저 뻐꾸기시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1층이 주인집, 2층이 우리집. (나무계단으로 1층과 2층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인집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네 집과 비슷했는데, 우리집도 비슷한 인테리어라서 제법 중산층 가정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집안 전체에 나무 자재를 꽤 많이 사용했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드셨는지, 어느 날 아버지는 뜬금없이 집에 벽시계를 들이셨다. 어지간해서는 물건을 지르는 분이 아닌데… 아버지가 들고 온 건 카이저 뻐꾸기시계. 당시에 무려 TV 광고까지 했던, 국내 벽시계 업계의 롤렉스라고 불릴 만한 유명 브랜드였다. 만듦새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무로 만든 케이스에는 마치 뻐꾸기 둥지처럼 새와 나뭇잎 같은 걸 조각해 두었고, 시계 밑에는 솔방울 같은 모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케이스 중앙에는 로만 인덱스 다이얼이 있었으며, 그 위에 아주 작은 창문이 있었다. 

정시가 되면 창문이 열리고 뻐꾸기가 튀어나와 기묘한 전자음으로 울어댔다. 뻐~꾹. 뻐~꾹. 1시에는 한 번, 12시에는 열두 번. 모두가 잠든 자정이면 뻐꾸기 소리는 꽤 오랫동안 울려 퍼졌는데, 이상하게도 주인집에서 이걸로 뭔가 잔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그들도 뻐꾸기 소리를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그걸 들을 정도로 청력이 좋지 않았던 걸까? (두 분 다 연세가 많았다) 층간소음으로 살인까지 일어나는 지금 세상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때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로 음식은 물론 공기나 소리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흘렀다. 어쨌든 나는 11시 59분 무렵이면 시계 앞에 서서 뻐꾸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초등학생에게 그건 시계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장난감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렇게 내 유년의 시간은 뻐꾸기 소리로 촘촘하게 채워졌다. 

카이저 뻐꾸기시계는 꽤 오래 우리집에 걸려 있었는데, 내가 군대에 다녀오니 사라져 있었다. 어머니 얘기로는 시끄러운 모터 소리가 났다고 한다. 케이스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 시계였으니 아마도 내부 부품들은 대부분 플라스틱이었을 거다. 안그래도 내구성이 약한데 점검도 하지 않고 장시간 방치했으니 결국 고장이 날 수밖에. 공산품으로 태어나 10년이면 꽤 오래 버틴 셈이지만, 시계라는 물건치고는 그리 오래 사용한 건 아니었다.

만약 카이저 뻐꾸기시계가 시간을 잘 견디는 물건이었다면, 오래 사용해도 가치를 유지하는 물건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때처럼 내 아이들의 시간을 뻐꾹 소리로 채워주고 있을 않을까?

  • 나무로 만든 뻐꾸기시계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과거의 단순한 저장소가 아니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와 연결되며, 현재를 구성하는 흐름 안에서 작동한다.”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소리, 움직임, 감정 같은 것이 축적된 사물이다. 뻐꾸기시계의 소리는 어린 시절 2층 주택의 구조, 나무계단, 주인집과의 관계 등 총체적인 감각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그건 내 의식 바깥에서 기억을 감각의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오브제였던 것이다. 카이저 뻐꾸기시계는 내 유년의 시간을 1시간 단위로 분절하던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기억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일종의 레코딩 장치였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기억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뻐꾸기의 기묘한 소리와 로만 인덱스, 나무의 결까지. 카이저 뻐꾸기시계는 한 장소에 고정된 물질인 동시에 기억의 지속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졌을 때 단지 시계 하나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응축된 시간과 기억의 연결선이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카이저 뻐꾸기시계가 가끔 생각나는 건 어쩌면 음식과 공기와 소리가 흐르던 2층 양옥집의 기억이 뻐꾸기 소리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카이저 뻐꾸기시계는 내 유년의 기억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레코딩 장치였다.
‘클락’의 가치: 레페 1839를 만나다

레페 부티크 전경

기억 속의 카이저 뻐꾸기시계가 다시 현실로 소환된 것은 지난해 11월,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레페 1839(L’Épée 1839, 이하 레페)를 만나고 나서다. 레페는 스위스 쥐라 델레몽(Delémont)에 위치한 고급 기계식 시계 브랜드로, 185년 이상 역사를 이어 왔다. 사업가 오귀스트 레페(Auguste L’Épée, 1798~1875)가 1839년 시계 부품과 오르골을 제작하기 위해 설립했으며, 1850년대부터 알람시계, 탁상시계용 레귤레이터를 제작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레페는 이러한 유산을 바탕으로 전통과 모던함을 결합한 새로운 시계 오브제를 제작하고 있다. 전통적인 탁상시계 브랜드를 넘어 현대적 조형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브랜드로 거듭난 것이다.

타임패스트 Ⅱ

V8 실린더가 움직이는 엔진

스티어링 휠로 시간을 조정하고, 기어 스틱을 조작해 와인딩할 무브먼트를 선택할 수 있다. 시동키를 돌리면 V8 실리더가 작동한다.

타임패스트 D8

타임패스트 D8의 레페 로고

압구정 갤러리아 레페 부티크 쇼케이스

수류탄을 모티브로 만든 그레네이드

컨템퍼러리 타임피스 컬렉션의 두엘 블랙 펄

캐리지 클락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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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의 뻐꾸기시계, 타임 테일즈

국내 론칭 행사에서 레페의 여러 테이블 클락 제품들을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기계식 메커니즘과 결합된 창의적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레페는 일상의 사물에서 얻은 아이디어에 기술과 기능을 결합해 예술적 오브제를 창조해낸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재미 요소’를 넣기 위해 노력한다. 금속을 깎아 만든 정교한 시계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시간이 지나도 카이저 뻐꾸기시계처럼 고장 나서 사라지는 일은 없겠구나.’

그리고 언젠가 내 어릴 적 아버지가 난데없이 뻐꾸기시계를 집에 가져왔던 것처럼, 나도 레페의 시계를 집에 두고 가족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마침 레페에는 ‘타임 테일즈(Time Tales)’라는 뻐꾸기시계도 있다!)

워치(손목시계)는 개인화된 사물이다. 반면에 클락(탁상시계 혹은 벽시계)은 한 공간의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사물이다. 클락은 그곳의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을 살아냈다는, 조용한 증표 같은 것이다. 빈티지 워치가 한 개인의 이야기를 간직하듯, 오래된 클락은 가족 전체의 기억을 품고 있다. 워치는 늘 나만의 시간을 가리키지만, 클락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시간을 알려준다. 정시가 되면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듣고, 같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클락은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을 담아내는 기계인 셈이다.

낡은 식탁 옆이나 거실 장식장 위.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제자리를 지키는 몇 안 되는 사물. 그 안에는 웃음과 다툼, 말없는 저녁까지, 공간을 함께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쌓여 간다. 그렇게 클락은 시간이 흐를수록 멋진 타임캡슐이 된다. 언젠가 누군가 그 시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는 단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풍경과 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마치 내가 기억 속의 뻐꾸기시계를 다시 꺼내 본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런 시계 하나쯤은 필요하다. 가족이 둘 이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니, 대가족일수록 가성비는 더 좋아진다) 함께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기억이 쌓인다. 그렇게 기억이 스며든 사물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그 집의 시간을 품은 구조물이 된다. 어쩌면 집안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건, 바로 그 시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론칭 행사장에서 레페가 우리집 역사의 증인이 되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 타임패스트 Ⅱ

  • 타임패스트 D8

  • 프로스퍼와 그레네이드

  • GPHG 2023 수상작 타임패스트 Ⅱ 크롬 에디션

  • 시간을 표시하는 디스크와 움직이는 V8 실린더

클락은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을 담아내는 기계다.
역사: 레페 1839의 탄생과 발전

창립자 오귀스트 레페와 첫 매뉴팩처

1839년, 41세의 오귀스트 레페는 제네바 출신의 피에르 앙리 파우르(Pierre-Henri Paur)와 함께 프랑스 두주의 생수잔(Sainte-Suzanne)에 시계 매뉴팩처를 설립했다. 당시 레페는 브레게와 더불어 프랑스 고급 시계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브레게가 주로 포켓 워치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다면, 레페는 기계식 알람시계나 오르골이 내장된 탁상시계 등 장식성과 예술성이 강조된 시계 분야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공예 장식품을 제작하던 이 전통은 오늘날 예술적 오브제를 만드는 브랜드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같은 해 스위스에서는 앙투안 노르베르 드 파텍과 프란치샤크 차페크가 ‘파텍과 차펙(Patek, Czapek & Cie)’을 설립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레페와 파텍필립이 정확히 같은 해에 시작된 셈이다. 이 시기는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이 프랑스에서 점차 스위스로 옮겨가던 전환점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브레게와 같은 거장들의 활약 덕분에 여전히 고급 기계식 시계 분야에서 존재감을 유지했지만, 기술력과 생산성 측면에서는 스위스가 빠르게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브레게의 사망(1833년)과 파텍필립의 설립(1839년)은 시계 역사에서 프랑스 시대의 쇠퇴와 스위스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프랑스에 기반을 둔 레페는 흔들림 없이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는 레페가 대량 생산되는 포켓 워치보다는 공예적 완성도를 갖춘 데스크 워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특히 레페는 왕실, 귀족, 외교 사절 등을 위한 의전용 시계를 다수 제작했다. 당시 탁상시계는 궁정, 고위 관료의 사무실, 귀족의 저택의 인테리어 소품이자 신분을 상징하는 오브제였고, 실용성 중심의 포켓 워치와는 시장이 달랐다. 레페는 이 틈새시장에서 기술과 미학을 갖춘 고급 제품을 선보이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레페는 예술성뿐만 아니라 기술력 측면에서도 뛰어난 브랜드였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유명 알람시계 및 캐리지 클락(Carriage Clock, 여행용 마차 시계) 제조사를 위해 플랫폼 이스케이프먼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레페는 여러 특허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품질 플랫폼 이스케이프먼트 생산업체로 자리 잡았는데, 1889년에는 연간 20만 개를 생산하며 기록적인 실적을 올렸고, 파리 만국박람회 등 여러 국제 박람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손목시계가 대중화되자 데스크 클락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다. 레페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시계 부품을 외부 브랜드에 공급하며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리고 1970년대 쿼츠 위기로 여러 시계 브랜드들이 위축되던 시기, 레페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1975년, 프랑스의 마뉘랭-마트라(Manurhin-Matra) 그룹이 레페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이후 레페는 여행용 탁상시계를 중심으로 한 고급 시계 브랜드로 재편되었고, 부품 제조 중심에서 완제품 중심의 럭셔리 시계 브랜드로 탈바꿈했다.

인수 직후인 1976년에는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Concorde)에 탑재되는 벽시계를 제작했는데, 이는 민간 항공기에서 사용된 유일한 기계식 시계로 기록된 바 있다. 이어서 1981년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에 참석한 주요 귀빈 100명에게 에르메스 가죽 케이스에 담긴 레페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또 1994년에는 ‘자이언트 레귤레이터(Giant Regulator)’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를 제작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 19세기 중반 레페가 생산한 플랫폼 이스케이프먼트

  •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받은 금메달

  • 1994년 제작한 자인언트 레귤레이터

레페가 ‘예술적 오브제’를 만드는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전환점은 2008년, 스위스 독립시계 브랜드 MB&F와의 협업이었다. 레페는 MB&F의 ‘HM2(Horological Machine No.2)’ 프로젝트에 부품 제조 파트너로 참여하며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스위스 기업 스위자(Swiza SA)에 인수된 레페는 이듬해 2009년 브랜드명을 ‘L’Épée 1839’로 변경하고, 전통적인 탁상시계 외에 모던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의 새 컬렉션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14년, 창립 175주년을 맞은 레페는 MB&F와 협업해 첫 번째 크리에이티브 아트 라인 작품인 ‘스타플릿 머신(The Starfleet Machine)’을 175개 한정으로 선보였다. 이 시계는 SF 드라마 <스타트렉>의 스타플릿 함선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 독특한 돔 다이얼과 더블 레트로그레이드 세컨드 핸즈를 갖췄다. 그리고 5개의 배럴을 이용해 40일의 긴 파워리저브를 제공했다. 

  • MB&F의 HM2

  • 첫 번째 크리에이티브 아트 라인 작품, 스타플릿 머신

이후 레페는 자동차에서 영감을 받은 ‘타임패스트 D8(Time Fast D8, 2019)’, ‘타임패스트 Ⅱ(Time Fast Ⅱ, 2022)’ 등을 출시했으며, 특히 2023년에는 ‘타임패스트 Ⅱ 크롬 에디션’이 GPHG에서 메커니컬 클락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세계 최대 럭셔리 그룹인 LVMH가 스위자를 인수하면서 레페는 LVMH 그룹의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지난 해 루이 비통이 공개한 몽골피에르 아에로(Montgolfière Aéro)는 레페의 ‘핫 벌룬’을 베이스로 제작한 것으로, 앞으로 레페와 LVMH 그룹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예상해 볼 수 있다. MB&F를 비롯한 기존 파트너십도 계속 유지되겠지만 티파니, 불가리, 위블로 등 LVMH의 여러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해 다양한 시계를 출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테면 불가리의 옥토나 세르펜티, 위블로의 클래식 퓨전이나 빅뱅 같은 아이코닉 워치를 재해석한 기계식 클락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다. 

루이비통과 협업한 몽골피에르 아에로

2024년, 레페는 LVMH 그룹의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기능에서 해방된 사물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이 레페는 설립 초기부터 시계라는 형식을 빌려 예술적인 공예품을 제작해온 브랜드다. 오늘날에도 형태와 스타일은 달라졌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맥락에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레페의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공간을 구성하는 조형물이자, 미적 오브제다. 달라진 건 양식의 변화뿐이다. 과거의 제품들이 바로크적인 장식미를 추구했다면, 오늘날의 제품은 현대 미술과 SF 디자인의 조형어휘를 끌어들이고 있다.

과거처럼 여전히 시계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이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디지털 기술로 늘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이제 시계의 실용적 기능은 무대 뒤로 퇴장하고 기호적 의미만이 전면에 부각된다. 따라서 ‘시계’가 아니라 ‘오브제’, 혹은 ‘사물’이라는 관점에서 레페를 바라보면 이 제품의 가치에 대해 보다 정확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가진 기호”라고 주장하며, 저서 『사물의 체계』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물이 자신의 용도에만 소용되는 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떠한 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이 새로운 구조 속에서 사물들의 상관관계와 이들의 초월에 의해 열리고 활기를 띠고 확장될 때만,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장 보드리야르, 『사물의 체계』

결국 공간이란 그 안에 놓인 사물들이 맺는 관계의 총합이다. 보드리야르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결국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의 집에는 어떠한 물건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사물도 두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재구성한다. 그건 취향을 넘어 사물과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존재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간에 어떤 사물을 배치한다는 것(혹은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가 그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인 동시에 공간에 의미를 더하는 행위다. 그리고 의미가 더해진 공간은 공간 속 인간의 삶에 에너지와 방향성을 부여한다. 쾌적하고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미학적으로 뛰어난 공간은 거주자에게 긍정적인 감정과 창조적인 영감을 준다. 이것은 단순히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닌, 주체와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의미 구조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의미 구조는 그 구조 안에 놓인 주체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 바로크적 장식미를 추구하는 캐리지 클락

  • 현대 조형 예술에 가까운 트라이포드

공간의 의미는 그 안에 놓인 사물들 간의 유기적이고 열린 관계에서 비롯된다. 각각의 사물들이 기호로서 서로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사물이 자신의 ‘용도(쓸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쓸모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소 기능이 아닌 기호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 사물은 쓸모에 묶여 있다. 침대, 시계, 전등, 문손잡이 같은 것들은 오직 기능에 봉사한다. 잠을 자게 해주고, 시간을 보여주고, 불을 켜고 끈다. 이런 사물들은 ‘쓰임’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하며,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쓸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물은 사회적 코드, 태도, 가치관 등을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적 사물들은 일단 자신의 ‘기능’에서는 해방되어 있다. “물건들은 접히고 펼쳐지며, 사라졌다가 필요한 순간에 나타난다.” 미니멀리스트의 방을 다시 떠올려보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의 방에는 흰색 접이식 매트리스가 있다. 그의 침대는 필요한 순간(기능이 필요한 순간)에만 잠시 존재했다가 다시 접혀서 사라진다. 그것은 늘 동일한 형태와 위치를 고수하는 전통적인 침대보다 훨씬 유연하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기능에서 해방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여전히 침대는 침대이고, 의자는 의자다. 진정한 전환은 사물이 ‘쓸모’ 그 자체에서 벗어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 그것이 바로 예술적 오브제다. 레페의 시계는 시계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시간’이라는 개념을 기호화한 하나의 예술적 조형물이다. 쓸모에서 벗어난 그 순간, 비로소 예술적 오브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 스컬링 보트를 형상화한 레가타

  • 쓸모에서 벗어난 그 순간, 비로소 예술적 오브제가 완성된다.

나의 시공간에 어떤 사물을 둘 것인가?

공간은 무한하지 않다. 하나의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면 그 공간에는 다른 사물이 끼어들 수 없다. 인테리어라는 건 다양한 물건들이 하나의 공간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급적 자신의 공간을 의미 있는 사물, 가치 있는 사물로 채워야 한다. 공간이 빈 캔버스라면 사물은 그 캔버스를 칠하는 물감이다. 작품의 가치가 물감의 가격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비싼 물건을 많이 둔다고 해서 멋진 공간이 되지 않는다. 어떤 위대한 작품은 몇 개의 점과 선으로도 충분하다. 즉 공간에 배치할 것들을 신중하게 선별해야 하는데, 이때 고려해야 할 것은 사물이 공간만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도 함께 점유한다는 사실이다. 

수명이 100년이라고 할 때 어떤 사물을 같은 공간에 둔다는 것은 그 100년이라는 시간의 일부를 사물에게 내어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특정 공간에 머무르기 시작한 사물은 그곳에서 계속 시간을 쌓아가면서 점차 오래된 사물로 변해간다.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오래된 사물은 체계의 범위 안에서 매우 특수한 기능”을 갖게 되며, 그 사물 자체가 시간을 뜻한다고 언급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 사물 자체가 시간으로 변해갈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누적되는 시간 속에서도 오랫동안 물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소재와 만듦새는 오랫동안 함께할 사물을 선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소재 자체의 한계가 있거나 내구성이 부족한 물건은 시간 속에서 금세 소멸해 버린다. 마치 우리 집에 있던 카이저 뻐꾸기시계처럼 말이다. 둘째, 사물의 기원과 탄생 과정이다. 사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이 쌓이게 되며, 한 번 쌓이기 시작하면 다시 벗겨낼 수 없다. 따라서 오랫동안 함께할 물건이라면 창조의 순간도 특별해야 한다. 

“장인이 만든 사물의 매력은 그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치게 되고 또한 작업이 거기에 새겨진다는 것에 기인한다. 우리는 창조되었던 것(그리고 창조의 순간이 재현될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한 것)에 매혹된다. 손의 실제적인 흔적에서부터 서명에 이르기까지 창조의 흔적에 대한 탐색은 혈통과 아버지의 초월성에 대한 탐색이다.” – 장 보드리야르, 『사물의 체계』

레페의 여러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금속 소재로 제작되어 충분한 내구성을 갖췄고, 1839년부터 이어온 역사적 스토리와 장인의 손길이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무엇보다 시간과 더불어 스스로 시간이 되는 이 물건은 내부에 ‘시계’라는 시간의 형식까지 품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괘종시계를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마음의 기계”이자 “시간의 실체에 스며들고 동화되는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시간에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사물로서 뚜렷하게 드러낸다. 오랜 시간 곁에 머문 사물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그 자체가 되어 공간 속에 조용히 퇴적된다. 그런 점에서 레페는 당신의 시공간을 점유할 자격이 충분하다. 

스스로 시간이 되는 이 물건은 내부에 ‘시계’라는 시간의 형식까지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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