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비트는 시계들: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크로노스의 질서에 맞서는 카이로스의 시계들
- 이상우
- 2025.10.29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먼저 ‘크로노스(Chronos)’는 물리적·선형적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시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시간 개념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균등하게 나눌 수 있으며, 시·분·초처럼 인간의 눈금으로 쪼개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는 물리학의 영역으로, 현대문명 역시 전적으로 이 크로노스의 시간 위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하루를 균질한 단위로 나누고 그 위에 질서를 부여해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신화 속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 과거를 삼키며 미래로 나아간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또 하나의 시간 개념은 ‘카이로스(Kairos)’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라는 양적 시간의 대척점에 있는 질적 시간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경험 안에서 의미가 응축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깨달음의 순간, 예술적 영감의 순간 같은 것들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라고 할 수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일반적인 시계로 표시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아무리 정확한 크로노그래프 워치라도 내가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측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적 체험이자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시계라는 도구 덕분이다. 시계는 태엽을 일정한 속도로 풀어내면서 선형적·연속적 시간을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시간이 선형적으로 일정하게 흐른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 속에서 시간은 결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시간은 너무나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며, 또 어떤 순간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시계가 보여주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카이로스의 시간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어쩌면 크로노스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계는 크로노스의 질서에 맞춰 작동하지만 어떤 시계들은 이 질서를 깨트린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멈추고, 흐릿하게 만든다. 크로노스의 시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퍼포먼스처럼 보일 것이다. (정확성과 오차율에 집착하는 것 역시 크로노스의 시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뒤틀린 시계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 시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대체로 카이로스적 시계들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간 표시 자체를 숨겨버리거나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비틀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시간도 파악할 수 없는 이런 시계가 대체 왜 필요하냐고. 하지만 이런 실험과 질문이야말로 럭셔리 시계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영역이라고 믿는다.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다른 도구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시계 산업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문명 사회에서 이런 속성은 꽤 치명적일 수 있다. (실제로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워치메이킹은 다른 첨단 도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소재와 가공법으로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허나 시계의 예술적 가치는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며, 결국 시계가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시간에 대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시계,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추구하는 시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평범한 산토스 뒤몽 워치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인덱스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마 숫자 인덱스라서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계에서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걸까? 만약 일반적인 시계처럼 바늘이 정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까르띠에는 무브먼트까지 수정해 바늘을 역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서 오히려 올바른 시간을 표시한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더해서 플러스를 만든 것. 움직이는 방향이 다를 뿐 시계의 시간은 여전히 정확하게 흘러간다. 중요한 건 사용자가 시간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인덱스가 뒤집힌 상태에서 반대로 흘러가는 바늘을 단번에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산토스 뒤몽 리와인드 워치는 시계 읽는 방식을 뒤집어서 시간을 낯선 것으로 만든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는 예술의 본질이 “사물을 낯설게 만들어 인식 과정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소격효과(Verfremdung)로 이전에 당연히 받아들이던 것들을 관객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까르띠에는 산토스 뒤몽 리와인드 워치에 ‘낯설게 하기’라는 상징적 피니싱을 더했다. 뒤집어진 다이얼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간은 낯선 시간으로 바뀌고, 그 순간 사용자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시간의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개성 넘치는 리차드 밀 시계 중에서도 꽤나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무브먼트를 가진 시계다. 크라운 중앙 푸셔를 누르면 투명 다이얼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시침도 다른 속도로 움직여서 현재 시간을 좀처럼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읽기 어지럽게(Dizzy) 만드는 것이다. 이 독특한 타임피스는 프랑스 작가 제라드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 1808~1855)의 시 ‘시간(Le Temps)’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간(Le Temps)
제라드 드 네르발
I
시간은 현자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시간을 비웃는다.
그만이 그 쓰임을 알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기쁨들 속에서
그는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법을 알고,
희망이 그에게 미소 지을 때
그 또한 희망에게 미소 짓는다.
II
행복은 영광 속에 있지 않다.
금빛 족쇄 같은 궁정의 삶에도,
승리의 환희 속에도,
월계관이나 사랑 속에도 없다.
그것은 만족한 영혼 속에 있다.
세상과 소란에서 멀리 떨어져
스스로 이룬 선함을 누리는 그 마음속에.
III
그는 자신의 뮤즈와 함께 평온히 살며,
골짜기의 나무 아래서
솟아오르는 샘물 소리를 듣는다.
비둘기와 방울새의 노래를 듣는다.
그는 사색하고, 글을 쓰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삶은, 자신과 조화를 이루며,
소리처럼 잔잔히 흘러간다.
IV
이렇듯, 인간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소음과 욕망에서 멀리,
그는 주의 흐름을 따라간다.
후회도, 기억도 없이.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간이
그를 들판에서 데려갈 때,
그는 저녁에 잠들 듯이 고요히 죽는다.
네르발은 보들레르처럼 시간을 두려움이나 상실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순환과 조화 속에서 평온한 죽음과 삶의 화해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의 시에서 시간은 파괴자가 아니라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리듬인 셈이다. 위 작품 속에 묘사된 것처럼 현자,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시간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능동적으로 다룰 줄 안다. 그는 시계와 세상이 부여하는 질서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리차드 밀은 시간을 비틀어버리는 ‘디지 핸즈’ 기능을 통해 사용자가 일상적인 크로노스의 시간과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을 오가는 메커니즘은 컬럼 휠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응용해 구현했다. 크라운에 위치한 푸셔를 누르면 사파이어 글라스 다이얼이 어긋나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한다. (15분에 1회전) 동시에 시침 역시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 조금만 지나도 시간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이얼과 핸즈가 엇갈리면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놀랄 필요는 없다. “그는 오히려 시간을 비웃는다. 그만이 그 쓰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푸셔를 누르면 칼럼 휠이 작동하면서 다시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온다.
에르메스가 2011년 선보인 르 땅 서스팡뒤 메커니즘을 새로운 에르메스 컷 컬렉션에 이식한 모델이다. 8시 방향의 푸셔를 누르면 시침과 분침이 즉시 12시 방향으로 점핑하면서 ‘V’자 형태로 정렬한다. 내부의 무브먼트는 계속 작동하고 있지만 핸즈는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즉 사용자의 주관적 시간이 잠시 멈추는 셈이다. 다시 푸셔를 작동하면 핸즈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며 현재 시간을 표시한다.
이 기능을 활용하는 방법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일반적인 기계식 시계처럼 사용하다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푸셔를 눌러서 시간의 흐름을 잠시 막아둘 수도 있다. 혹은 평소에 시간을 흐르지 않게 두다가 필요할 때만 온-디맨드 방식으로 현재 시간을 표시할 수도 있겠다. 분명한 건 이 특별한 메커니즘이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을 또 다른 차원으로 완전히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4시 방향의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초침도 주목할 만하다. 이 스몰 세컨즈는 24초에 한 바퀴씩 빠른 속도로 역회전하며, 바늘이 12시 방향에 멈춰 있을 때도 시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러닝 인디케이터 역할을 수행한다. 이 독창적인 컴플리케이션은 자체 제작 칼리버 H1912로 작동하며, 아장호(Agenhor)의 장-마크 비더레히트(Jean-Marc Wiederrecht)가 개발한 르 땅 서스팡뒤 모듈이 탑재되어 있다.
2015년 애플 워치가 출시되자 이듬해 H. 모저 앤 씨는 스위스 Alp 워치(Swiss Alp Watch)라는 모델을 선보였다. 애플 워치와 유사한 디자인에 기계식 무브먼트를 담아낸 이 시계는 애플워치에 대한 오마주이자 스위스 시계 산업의 출사표였다. 첨단 디지털 기계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지켜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진 셈이다. 콘셉트 블랙 모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핸즈 마저 없애버린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 워치다. 핸즈가 없기 때문에 시간은 오직 미닛 리피터 소리로만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미닛 리피터의 활용성을 극대화시킨 시계일지도.
깊이감 있는 블랙 다이얼은 일상의 흘러가는 시간과 분리되어 언제라도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도록 돕는다. 6시 방향의 투르비용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며, 현재 시간이 알고 싶다면 미닛 리피터를 작동시키면 된다. 물론 차임이 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그것은 이미 과거의 흘러가 버린 시간일 뿐 현재의 시간은 아니다. (사실 완벽한 현재의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검은 다이얼은 마치 블랙홀처럼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빨아들이는 듯하다.
심플한 앞면과 달리 뒷면에서는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장치를 감상할 수 있다. 케이스 형태에 맞춘 직사각형 HMC 901 칼리버는 제네바의 MHC와 협업한 무브먼트로, 뛰어난 마감과 기하학적 구조를 갖췄다. 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크라운에는 12개의 눈금이 그어져 있다. 눈금 하나당 5분으로, 미닛 리피터의 소리를 시간을 확인한 다음, 크라운 눈금을 보고 현재 시간을 대략적으로 맞출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시간을 맞춰야 하나 싶지만…)
H. 모저 앤 씨의 스위스 Alp 워치 콘셉트 블랙과 비슷하게 시간 자체를 표시하지 않는 시계다. 다만 이쪽은 애플 워치가 아닌 디스플레이가 꺼진 갤럭시 워치처럼 보인다는 것. 스마트 워치처럼 생겼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 블랙 글라스 아래에는 무려 플라이 투르비용이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칼리버 ZEN-H9은 60초 센트럴 투르비용을 갖춘 수동 와인딩 무브먼트로 약 38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사용자가 감상할 수는 없다.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블랙 컬러로 코팅해 아예 보이지 않도록 처리했기 때문.
이 시계는 독립시계 제작자 비트 할디만(Beat Haldimann)의 시간에 대한 철학을 보여준다. 그는 첫 작품 H1의 센트럴 투르비용을 통해 “시간 읽기 전에 시간을 먼저 느껴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 H8에서는 시침과 분침을 제거해 시간 읽는 행위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으며, H9는 이런 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서 센트럴 투르비용마저 볼 수 없도록 해버렸다. 이 시계에서 시간은 오직 투르비용이 움직이는 소리를 통해서 ‘느낄 수만’ 있다. 할디만은 이를 “시간의 부재 속에서 들리는 존재의 울림”으로 표현하며, H9을 통해 시간의 순수한 부재를 완성했다고 강조한다.
할디만의 H9 리덕션에서 시간은 흘러가지만 표시되지 않는다. 이 타임피스는 불투명한 유리 뒤에 시간을 숨겨서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행위 자체를 되돌아보게 한다. 즉, 시간 측정의 도구가 아닌 사유의 장치이며,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예술적 매개체인 셈이다.
F.P 주른 출신의 독립시계 제작자 루도빅 발루아르가 제작한 창의적인 시계다. 형태적으로는 여전히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러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특별한 메시지와 기술적 성취가 담겨 있다. 루도빅 발루아르는 11개의 아워 인덱스를 뒤집어서 전통적 시간 개념을 뒤집는다. 다이얼 위에는 12개의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가 배치되어 있는데, 현재 시각을 나타내는 숫자 하나만 정상적인 방향이고, 나머지 11개의 숫자는 모두 뒤집혀서 배열되어 있다. 매 정시마다 현재 시간을 알려주던 숫자 인덱스는 180도 회전해 뒤집어지고, 뒤집혀 있던 다음 숫자가 정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순차적으로 시간을 표시한다.
이 시계가 등장한 시기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다. 주식 시장을 비롯하여 모든 숫자가 폭락하는 상황에서 루도빅 발루아르는 단 하나의 숫자라도 버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삶의 모멘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시계 디자인에 반영했다. 거꾸로 뒤집힌 과거(혹은 미래)의 숫자는 오직 현재의 시간만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업사이드 다운은 과거와 미래는 뒤집혀 있고, 지금이 유일하게 바로 서 있다는 메시지를 통해 균질하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맞선다.
메시지를 풀어내는 기술력 역시 돋보인다. 자체 제작 칼리버 LB01은 각 숫자에 12개의 말테 크로스 부품을 부착했다. 센터 휠이 60분마다 1회전하며, 이 과정에서 스네일 캠, 레버 등 여러 부품들이 말테크로스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제어한다.
오틀랑스의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 자체가 없다. 핸즈와 인덱스가 있어야 할 다이얼에는 작은 미로가 놓여 있다. 시간 같은 거 확인할 생각 말고 그 시간에 게임이나 한판 즐기라는 뜻. 다시 말해 미로 다이얼은 놀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라며 사용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사실 놀이의 시간이야말로 일상의 시간과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아닐까? (게임에 빠져 있다가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버린 경험을 떠올려 보라!)
시계는 미궁 속으로 사라졌지만 시계의 미학은 미로 곳곳에 남겨 뒀다. 골드 미궁의 바닥은 샌드 블라스트, 벽은 새틴 브러시드 마감했으며, 벽 테두리는 모두 베벨링 처리했다. 시계 장치가 없을 뿐 기계 장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크라운을 돌리면 기계식 리프트가 작동해 골인 지점에 도착한 공을 출발 지점으로 옮겨준다.
표면적으로는 전통적인 손목시계의 형태를 갖췄다. 주목해야 할 건 중앙 핸즈가 아니라 3개의 서브 다이얼이다. 2시 방향의 ‘Earth’ 카운터는 지구가 자전하는 거리를 10km(22초 소요)까지 측정할 수 있고, 4시 방향의 ‘Sun’ 카운터는 지구가 공전하는 거리를 1,000km(34초 소요)까지 측정할 수 있다. 또 9시 방향의 ‘Orbit’ 카운터는 1,000km의 자전 거리와 64,000km의 공전 거리를 하나의 바늘로 표시한다(36분 소요). 케이스 백의 24시간 스케일 역시 하루 동안 지구가 자전한 거리(40,075km)와 공전한 거리(2,572,992km)를 표시했다. ‘스페이스 미터’라는 이름처럼 시계 전체가 공간 혹은 우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간의 탄생>의 저자 알렉산더 데만트(Alexander Demandt)가 이야기했듯이 궁극적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은 움직임(운동)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대상과 공간을 요구한다. 즉 공간적 개념으로부터 시간의 기본 개념이 도출되었으며, 우리가 시계를 통해 사용하는 시간이란 결국 우주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공간적 접근은 전통적인 시간 읽기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지금 몇 시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고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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