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브레게(Breguet)의 창립 250주년이었다. 종목을 막론하고 단일 브랜드의 역사가 250년이나 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브레게가 1년에 걸쳐 선보인 시계 하나하나도 주목할만했다.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제품 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250주년의 포문을 연 클래식 수스크립션 2025와 피날레를 장식한 익스페리멘털 1이었다. 클래식 수스크립션 2025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대상인 애귀유 도르를 수상했다. 고급 시계 브랜드가 단순히 좋은 시계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시계 제작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 나가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브레게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브랜드이며,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아쉽게도 강력한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브랜드 파워가 강력해 보이지 않고, 중고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체질을 개선하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내실을 더욱 단단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브레게는 풍부한 역사와 기술 혁신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알리는데 주력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브레게 홀마크(Breguet Hallmark)도 이런 변화의 일환일 것이다.
기계식 시계는 제법 긴 스펙 시트를 제공하여 제품의 특징을 소비자들에게 고지한다. 시계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허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잘 모르는 자동차나 전자 기기의 스펙 시트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계의 성능을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지표로 입증하는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COSC, 제네바 씰(Poinçon de Genève), 천문대 크로노미터(Observatory Chronométrique), 퀄리테 플러리에(Qualité Fleurier) 같은 인증 제도는 시계의 성능을 공인한다. 이 같은 제도는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고, 제품의 경쟁력을 높인다.
위에서 언급한 인증 제도는 제조사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인증 기관은 제조사가 의뢰한 제품(시계) 혹은 재공품(무브먼트)을 검사하고 결과를 통보한다. 그에 반해 브레게 홀마크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된다. 브레게가 스스로 정한 기준에 의거하여 시계의 성능을 보증하는 것이다. 외부 기관의 공증 없이 자신들의 제품을 자신들이 보증하려면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도 많이.
자체 인증 제도를 공표하는 브랜드는 손에 꼽는다.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은 2009년부터 제네바 씰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파텍 필립 씰(Patek Philippe Seal)을 도입했다. 100년 넘게 제네바 씰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파텍 필립이지만 제네바 씰만으로는 시계 전체의 완성도를 보증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제네바 씰이 무브먼트의 마감에 대한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텍 필립은 진화하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했다.
롤렉스(Rolex)는 초창기부터 공식 인증에 진심이었다. 1910년 스위스 비엔에 있는 공식 시계 평가 센터에서 크로노미터 인증을, 4년 뒤에는 영국 런던의 큐 천문대에서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다. 롤렉스는 자사 제품의 뛰어난 성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를 일찌감치 구축하여 홍보에 활용했다. 급기야 1950년대 후반에는 최상급 크로노미터(Superlative Chronometer)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그리하여 데이트저스트와 데이-데이트 시계의 다이얼에 처음으로 최상급 크로노미터 공식 인증(Superlative Chronometer Officially Certified)이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롤렉스는 크로노미터의 기준을 끊임없이 뛰어넘으려 했으며, 이를 통해 권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2015년에 롤렉스는 설립 90주년을 기념하며 최상급 크로노미터 인증을 새롭게 규정했다. 롤렉스는 COSC 인증을 받은 무브먼트를 회수한 뒤 시계에 조립하고 자체 개발한 방법을 이용해 검사한다. 최상급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정밀함은 물론이고 방수, 파워리저브, 와인딩 등 시계의 작동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엄격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최상급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시계의 하루 오차는 ±2초에 불과할 정도로 탁월하다. 최상급 크로노미터는 문자 그대로 롤렉스 시계의 탁월함을 의미한다.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Grand Seiko Standard)는 스위스 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의 의지 표명이었다. 그랜드 세이코는 1960년에 출시한 최초의 그랜드 세이코 시계를 국제 표준 크로노미터 인증 테스트를 수행하는 사무국(Bureaux Officiels de Controle de la Marche des Montres)의 기준에 맞춰 제작했다. 스위스 시계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앞두고 일반적인 크로노미터를 상회하는 보다 엄격한 자체 기준의 필요성을 깨달은 그랜드 세이코는 1966년에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를 마련했다. 새로운 세대의 기계식 칼리버 9S가 출시된 1998년에는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를 현대적인 기준에 맞춰 재설정했다. 기계식 무브먼트의 경우 17일간 여섯 가지 자세와 세 가지 온도에서 테스트를 거친다. 하루 허용 오차는 -3~+5초로 COSC 보다 엄격한 수준이다.
예거 르쿨트르(Jaeger_LeCoultre)는 1992년 마스터 컨트롤을 출시하면서 1000시간 컨트롤(1000 Hours Control)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1000시간 컨트롤은 조립된 시계를 대상으로 시행한다. 6주(1,000시간) 동안 진행되는 테스트는 실제 착용을 상정한 시뮬레이션을 비롯해 위치 및 온도 변화에 따른 오차, 충격 저항성, 파워리저브, 방수(기압) 성능을 확인한다. 1000시간 컨트롤을 통과한 시계의 케이스와 무브먼트에는 1000시간 컨트롤 앰블럼과 문구가 새겨진다. 참고로 예거 르쿨트르는 1000시간 컨트롤의 기준을 강화한 새로운 인증을 선보일 예정이다.
브레게가 추구하는 가치와 우수성을 대변하는 장치인 브레게 홀마크는 홀마크 위원회에 의해 운영된다(주: 브레게 홀마크를 정의하고 적용하는 권한을 가진 홀마크 위원회는 브레게 홀마크의 발행 여부를 결정한다). 이들은 품질, 성능, 윤리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통해 시계를 평가하는 기준을 확립했다. 첫 번째 가치는 부품의 품질에 대한 항목으로 마감 기법과 이를 구현하는 방식 그리고 전체 디자인의 일관성을 아우른다. 장인들은 브레게의 내부 규정에 따라 수작업으로 부품을 마감한다. 인그레이빙, 에나멜링, 기요셰, 젬 세팅 등 모든 기술은 명확한 원칙에 의해 적용하며, 일관된 품질을 추구한다.
두 번째 가치인 성능은 높은 기술적 완성도와 관련이 있다. 크로노미터 성능, 자성, 모델 별로 설정된 방수 능력에 따라 시계를 평가한다. 차이밍 워치의 경우 음향 성능(화성 및 멜로디 조율, 음의 지속 시간, 볼륨)까지 따진다. 테스트는 브레게 매뉴팩처에 설치한 무향실에서 이루어진다. 지극히 주관적 영역일 거라고 생각했던 청각적 기능에도 나름의 규정을 마련했다는 건 브레게 홀마크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밀함은 시계의 용도에 따라 달라진다. 익스페리멘털 1과 같은 과학용(Scientific) 시계의 경우 하루 허용 오차는 ±1초에 불과하다. 현재 운영중인 모든 인증 제도 가운데 가장 엄격하다. 이를 통해 브레게가 기술 혁신은 수치로도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시계를 만들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일상 및 스포츠용(Civil & Sport) 시계 카테고리가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시계의 하루 허용 오차는 ±2초다. 롤렉스의 최상급 크로노미터나 파텍 필립 씰의 기준에 뒤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성용 시계가 포함될 이브닝 및 주얼리용(Evening & Jewellery) 시계 카테고리가 있다. 하루 허용 오차는 -2~+6초. 무브먼트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허용 오차의 폭도 넓다. 그럼에도 COSC 보다 정확한 성능을 요구한다.
브레게 홀마크에는 기계식 시계의 성능을 저해하는 자성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다. 브레게 홀마크 인증을 받으려면 스위스 시계 산업 표준 NIHS 90-10에서 규정한 조건(4,800A/m) 보다 최소 10배가 넘는 자기장에 노출되어도 정확성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장에 노출된 시계에는 자기가 잔류하는데 이때 측정한 오차는 NIHS 90-10 표준이 허용하는 수치의 최소 1/3 수준으로 작아야 한다. 브레게 홀마크의 엄격한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는 의미다.
끝으로 윤리적 가치는 브레게가 시계를 제작하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다. 브레게 홀마크는 모든 부품이 최고 수준의 시계 제작 기준에 따라 스위스에서 제작되었음을 뜻한다. 수공 예술에 내제된 윤리적 가치를 존중하는 브레게는 전통적인 시계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힘쓰고 있다. 일례로 브레게는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기요셰 기술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고 있다. 예전에 출시했던 제품이든 현재 출시하고 있는 제품이든 상관없이 유지 관리에 적합한 방법을 개발하는 전문가를 확보하고 양성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종국적인 목표는 시계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처럼 브레게 홀마크에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가치가 담겨 있다.
제조사가 외부 기관의 인증에 안주하지 않고 자체 인증 제도를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제조사가 고유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상의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특별한 부품 또는 자체적인 메커니즘을 사용하거나 탄탄한 설계를 기반으로 성능을 끌어올린다. 이는 고급 시계 제작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과 같다. 두 번째는 차별화다. COSC 같은 인증은 여전히 훌륭하지만 초격차를 원하는 제조사에게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체 기준을 통해 차별화된 포지션을 구축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세 번째는 품질 관리다. 단순히 무브먼트의 오차만을 검증하는 것을 넘어 실제 착용 환경에서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자사 제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은 소비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제품의 소장 가치를 높인다. 이는 곧 소비자와의 약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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