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모리츠 그로스만(Moritz Grossmann)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건 2010년대 초반이다. 당시에는 모 스위스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해외 시계 브랜드의 국내 영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업무 특성상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미진출한 브랜드의 연락을 종종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유통 및 판매를 담당할 파트너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모리츠 그로스만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브랜드를 론칭하고 2010년 첫 번째 시계 베누(Benu)를 출시한 모리츠 그로스만은 이제 막 날갯짓을 시작한 신생 브랜드였다. 재직하던 회사가 모리츠 그로스만을 담당할 가능성은 전무했지만 흥미가 동했던 나는 지금은 사라진 바젤월드에서 모리츠 그로스만의 부스를 방문했다.
독일 글라슈테를 뿌리로 삼은 브랜드인지라 막연히 랑에 운트 죄네나 노모스 글라슈테를 생각했던 나는 모리츠 그로스만의 시계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모리츠 그로스만의 시계는 랑에 운트 죄네처럼 현대적인 하이엔드를 지향하는 것도, 노모스 글라슈테처럼 바우하우스 철학을 토대로 한 실리주의를 펼치는 것도 아니었다. 모리츠 그로스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모리츠 그로스만 그 자체였다. 고전적이만 무디지 않았고, 단정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모리츠 그로스만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한국에도 모리츠 그로스만의 판매처가 생겼다. 나는 가끔씩 모리츠 그로스만의 시계를 볼 기회가 있는데 이번에는 37 아라빅(37 Arabic)과 마주했다. 지난날 모리츠 그로스만을 처음 봤던 그때의 흥분과 설렘이 다시 샘솟는 기분이었다. 옛 연인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37 아라빅에 완전히 몰입했다. 단지 내가 작은 시계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37 아라빅의 크기는 이름대로 37mm다. 시계는 분명 작아지는 추세지만 그럼에도 37mm 시계는 대다수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약간 작다. 현대 드레스 워치의 크기는 대부분 40mm 전후로 형성되어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 37mm 시계는 개발자와 의사결정권자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롱 파워리저브가 필수 덕목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37mm 시계는 일종의 핸디캡이다. 무브먼트에 충분한 크기의 메인스프링과 배럴을 실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만의 주관을 확립한 보통의 남성이 아니라면 37mm 시계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37mm 시계는 제조사의 의중이 명확하게 반영되는 마이너한 장르다. 자사 제품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과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그레일 워치 9.1: 모리츠 그로스만 X 카리 부틸라이넨 베누 37 스테인리스 스틸 "저먼 실버"(Grail Watch 9.1: Moritz Grossmann × Kari Voutilainen Benu 37 Stainless Steel “German Silver”)
2018년 모리츠 그로스만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베누 컬렉션을 통해 37mm 시계를 처음 출시했다. 베누만의 디자인을 유지한 채 크기를 축소시켰다. 시계 업계의 유행과는 동떨어졌지만 애호가들은 이 시계에 주목했을 것이다. 근거는 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찾을 수 있다. 특별한 의미를 담아야 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의 특성상 모델 선정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데 모리츠 그로스만이 그 많은 제품 가운데 37mm 시계를 선택한 것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모리츠 그로스만은 훌륭한 심미안을 가진 일본의 시계 애호가를 위해 베누 37 일본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한 전적이 있다. 모리츠 그로스만의 도쿄 부티크 개장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이 모델은 15개의 스테인리스 스틸과 18개의 로즈 골드로 선보였다. 그레일 워치(Grail Watch)와 함께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한 적도 있는데 역시 베누 37이 주인공이었다. 이쯤 되면 모리츠 그로스만의 37mm 시계에는 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현재 모리츠 그로스만의 포트폴리오에는 총 4개의 37 아라빅이 있는데 내게 찾아온 건 그 중에서도 뚜렷한 개성을 가진 빈티지(Vintage)다. 다른 37 아라빅 모델과 비교를 해봤는데 여러모로 빈티지가 단연 으뜸이었다. 37 아라빅 빈티지가 가장 뛰어난 입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체감의 대부분은 다이얼에서 비롯한다. 가공하지 않은 저먼 실버 플레이트는 질감을 살린 매트 블랙 피니싱을 적용했다. 안트라사이트 다이얼은 빛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다. 반사광을 약화시켜 각도에 따라 밝거나 어둡게 보이는 벨벳과도 비슷하다. 검은색이었다가 갈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회색으로도 보인다. 실내에서는 변화의 폭이 비교적 덜하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실로 변화무쌍하다. 플린지에 빛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시계 안에 피어나는 신비한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은으로 만든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1875년에 썼던 것과 동일한 타이포그래피의 로고, 미니트 트랙, 서브 세컨드 다이얼은 브러시드 가공으로 마무리했다. 보통은 수직이나 수평으로 결을 살리는데 이 시계는 사선으로 처리했다. 무엇보다 양각이기 때문에 다른 모델보다 입체감이 월등하다. 바늘에서는 완성도에 대한 모리스 그로츠만의 집착이 느껴진다. 다이아몬드 줄(files)로 가다듬은 스틸 소재의 바늘은 나무 디스크로 베벨링을 해서 모서리에 광택을 낸다. 폭이 매우 얇은 구간과 길고 날렵한 팁이 공존하는데 정교한 솜씨가 없으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바늘의 품질은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바늘을 직접 만들지 않는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모리츠 그로스만의 정성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베젤, 미들 케이스, 케이스백까지 총 3개의 덩어리로 구성된 케이스는 두께가 9.2mm다. 물론 이것도 훌륭하지만 두께가 7~8mm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테프넛 39mm 모델의 두께가 8.5mm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37 아라빅 빈티지는 형제 중 유일하게 귀금속이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로 케이스를 제작했다. 케이스는 모든 면을 새틴 브러시드 처리했고, 모서리는 부드럽게 다듬었다. 케이스와 러그 사이로 틈이 보이는데 용접해서 만들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인데 연간 생산량이 많지 않은 독립 브랜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브먼트는 잘 차린 한상을 보는 듯하다. 핸드와인딩 칼리버 102.1는 지름이 26mm에 두께가 4mm로 요즘 나오는 무브먼트 치고는 작다. 지름이 30mm도 되지 않기 때문에 케이스에 무브먼트를 고정할 링이 필요하다. 케이스와 무브먼트의 크기가 차이가 많이 나면 무브먼트 링도 덩달아 커지는데 보기에 좋지 않다. 다행히 37 아라빅에서는 거슬리지 않는다. 저먼 실버로 만든 무브먼트에는 글라슈테 워치메이킹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밸런스와 이스케이프 휠을 제외한 나머지 기어트레인은 3/5 플레이트 한 장으로 고정했다. 기둥과 커다란 플레이트를 사용한 구조는 18세기까지 성행했던 방식이다. 커다란 플레이트로 기어트레인을 고정하니 안정적이지만 조립할 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톱니바퀴의 피벗이 주얼 구멍에 정확히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글라슈테 리빙(글라슈테 스트라이프)은 폭이 커 시원시원한 인상을 제공한다. 센터 휠과 3번 및 4번 휠을 위한 주얼에는 골드 샤통을 적용했다. 나사를 이용해 동그란 금속으로 주얼을 고정하는 방식인데 현대 손목 시계에서는 기능적으로 불필요하지만 미학의 관점에서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나사는 짙은 파란색을 띄도록 열처리했다. 모리츠 그로스만이 선호하는 갈색-보라색(Brown-Violet)보다는 약간 높은 온도로 가열했다. 열처리의 어려운 점은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풍부한 경험과 예리한 눈 그리고 직감에 의존해야 하는 작업을 모리츠 그로스만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다. 무브먼트 크기에 맞춰 래칫 휠도 작아졌다. 그로 인해 스네일링(Snailing) 마감을 3줄이 아닌 2줄로 했다. 크라운 휠과 래칫 휠의 이빨은 베벨링과 폴리싱으로 광택을 내고 섬세하게 다듬었다. 밸런스 콕과 이스케이프 휠 콕에는 수작업으로 인그레이빙을 새겼다. 매력적인 요소지만 정작 구현하는 브랜드는 손에 꼽을 정도다.
밸런스 스프링의 유효 길이를 조절해 오차를 조절하는 인덱스는 밸런스 콕의 횡단 보어(transversal bore)에 연결되어 있다. 밸런스 콕 측면에 있는 나사를 돌려 횡단 보어를 이동시키면 인덱스가 좌우로 움직이며 오차를 조정한다. 밸런스 휠은 두 군데를 움푹하게 가공하고 미세 조정을 위한 나사를 설치했다. 한쪽에 3개씩 총 6개의 나사를 박았는데 조정은 가운데에 위치한 크기가 좀 더 작은 나사가 담당한다. 밸런스 휠을 이런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공기 저항을 줄이고 밸런스 휠을 최대한 크게 만들기 위해서다. 이론적으로 밸런스 휠의 지름이 커지면 관성이 커져 등시성이 증가한다. 협소한 공간으로 인해 오버코일이 아닌 평평한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밸런스 스프링의 종단과 연결된 스터드를 비롯해 스터드를 부착하는 부품의 디자인 역시 독특하다.
기어트레인의 톱니바퀴는 황동이 아닌 ARCAP으로 제작했다. ARCAP은 구리, 니켈, 아연 등으로 이루어진 합금으로 내자성과 내식성이 우수하다. 열에 대한 안정성이 높은 데다가 가볍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스와치를 비롯해 리차드 밀, 우르베르크 등이 ARCAP을 사용한다. 팰릿 포크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뱅킹 핀의 위치라든가 화이트 사파이어 주얼, 스프링을 이용한 클릭 시스템도 흔히 볼 수 없는 디테일이다.
모리츠 그로스만은 모든 무브먼트를 2번 조립한다. 처음 조립할 때는 모든 부품과 구성 요소가 원활하게 기능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이때 톱니바퀴의 엔드셰이크(Endshake)와 이스케이프먼트 그리고 밸런스 휠을 조정한다. 조정을 마치면 손목 위의 움직임을 상정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이렇게 검증한 무브먼트는 완전히 분해하고 일부 부품에 마감을 더한 뒤 최종 조립한다.
착용했을 때는 손목 안에 딱 들어온다. 케이스나 러그가 손목을 많이 이탈하면 착용감이 좋지 않고 불안정하게 느껴진다. 37 아라빅 빈티지는 그런 측면에서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시간만을 알려주는 심플 워치이니 조작은 별 게 없다. 와인딩 할 때의 느낌은 끈적하다. 핸드와인딩 시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메인스프링의 억센 토크가 손끝으로 전해진다. 핸드와인딩임에도 와인딩을 할 때 부드러운 시계가 있는데 37 아라빅 빈티지는 기분 좋은 저항감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핸드와인딩 시계 최고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다만, 크라운을 뽑아서 바늘을 돌릴 때는 마치 날아갈 듯 가벼웠는데 내가 기대하던 묵직한 조작감은 아니었다(실제 판매용 제품은 다를 수 있다). 핸드 스티칭을 넣은 쿠두 스트랩은 에이징이 된 것 마냥 표면이 얼룩덜룩했는데 시계가 풍기는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질감 없이 녹아 들었다. 폴딩 버클이 아닌 핀 버클을 연결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불편하지만 착용감은 좋기 때문이다.
작은 시계를 좋아하는 만큼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37 아라빅 빈티지를 대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크기는 이 시계가 가진 매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37 아라빅 빈티지는 절제된 미와 호화로운 디테일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기교를 부렸는데 우직하다. 형용 모순이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37mm 남성용 드레스 워치는 종류가 많지 않은데 존재감마저 뚜렷하니 참으로 귀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만 손목을 들어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계를 멀리하게 만드는 중대한 요인은 가격이다. 약 7,000만원인데 내로라하는 고급 시계 브랜드의 심플 워치와 비교해도 비싼 편이다. 심지어 37 아라빅 빈티지의 케이스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그럼에도 세부 내용과 이 시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찬찬히 되짚어본다면, 자신이 클래식 또는 빈티지 애호가라고 자부한다면 37 아라빅 빈티지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시계를 접하는 순간 몰아치는 디테일의 홍수 속에 허우적대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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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름 :
- 37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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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께 :
- 9.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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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
- 스테인리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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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
- 사파이어 크리스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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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 :
-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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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랩 / 브레이슬릿 :
- 브라운 쿠두 가죽 스트랩, 스테인리스 스틸 핀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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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얼 :
- 안트라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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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먼트 :
- 칼리버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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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식 :
- 핸드와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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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 :
- 시, 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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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당 진동수 :
- 21,600vph(3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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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리저브 :
- 4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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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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