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손목시계에서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는 상수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변수가 없는 건 아니다. 지리하고 험난한 이스케이프먼트의 세계로 스스로를 내던진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이 열정 넘치는 개혁가들은 시계 예술의 다양성을 실현하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레더러(Lederer)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내가 레더러에 관심을 가진 건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가 홍역을 치르던 와중이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와 조지 다니엘스의 혁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체화한 레더러가 2024년 GPHG에서 크로노메트리 부문을 석권하자 나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제네바 워치 데이즈가 열린 지난 9월 나는 레더러의 창립자 베른하르트 레더러(Bernhard Lederer)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짧았던 만남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그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명확성을 위해 편집 및 요약됐다.
처음부터 워치메이커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시계의 매력에 푹 빠졌을 뿐이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워치메이킹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여러 종류의 이스케이프먼트가 있다는 것과 이스케이프먼트마다 고유한 음향적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벼룩시장에서 판매중인 낡은 회중시계에 귀를 대고 소리만으로 이스케이프먼트를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의 호기심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됐다. 역사적인 걸작이 가득한 시계 박물관에서 견습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시계를 만지고 연구할 때면 과거의 워치메이커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계 박물관은 나의 학교였고, 위대한 거장들은 나의 선생님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들이 걸었던 길을 뒤따랐다.
일단 대형 브랜드는 거의 대부분 스위스에 있다. 나는 독일에 살고 있었고,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복원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계 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계를 복원하면 제작자처럼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 논리,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계 제작의 기반을 닦은 선구자들을 향한 겸손과 존경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대형 브랜드에서는 설정된 생산량과 목표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진다. 반면에 복원을 이끄는 것은 경외심이다. 나는 복원을 하면서 무브먼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이는 오늘날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기초가 됐다.
나는 AHCI(독립 시계 제작자 협회, Académie Horlogère des Créateurs Indépendants)의 초창기 회원으로 가장 오랫동안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AHCI가 출범했을 때 독립 시계 제작은 일종의 신념과 같았다. 우리는 쿼츠 시계가 시장을 지배하던 와중에도 기계식 시계와 시계 예술의 가능성을 굳게 믿은 소수의 워치메이커였다. 단지 그렇게 믿었을 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위기는 뜨거웠다. 경쟁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달랐지만 진정한 시계 제작은 자유로운 창조자의 손과 마음에서 탄생한다는 믿음 하나로 끈끈하게 뭉쳤다.
시계를 복원하면 제작자처럼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때의 독립 시계 제작은 생존을, 현재의 독립 시계 제작은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립 시계 제작자들이 오직 열정에 기대어 고독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그에 반해 현재는 진정한 장인정신의 가치와 숨은 노하우(savoir-faire) 그리고 무브먼트 안에 담긴 인간의 손길을 알아보는 수집가들의 커져가는 호기심과 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기계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시계 제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시계 제작이 앞으로 어떤 매력을 선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에 출시한 BLU 마제스티 MT3.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3개의 투르비용으로 시간을 표시한다. 가장 느리게 회전하는 투르비용은 12시간에 한 바퀴, 그 다음 투르비용은 1시간에 한 바퀴를 회전한다. 가장 속도가 빠른 투르비용은 1분에 한 바퀴를 회전한다. 무브먼트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케이스 측면에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케이스와 측면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그리고 베젤을 나사와 12개의 기둥으로 고정한다. 12개의 기둥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아워 마커이기도 하다.
BLU라는 이름은 시계 제작자 베른하르트 레더러(Bernhard Lederer Uhrenmacher)의 이니셜에서 따왔다. BLU는 시간을 시처럼 표현하고 싶었던 나의 열망에서 탄생했다. BLU의 시계는 즐겁고 유쾌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우주와 같았다. 시간에 대한 찬사의 의미를 담아 회전하는 다이얼, 궤도를 따라 도는 바늘, 케이지 없는 투르비용이 있는 시계를 만들었다. 마제스티 MT3 투르비용을 보면 BLU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2008년에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BLU는 멈춰 섰지만 나는 BLU에 대한 애정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모든 BLU 시계의 부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프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BLU와 레더러의 시계가 다른 이유는 시계 제작의 미학과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이다. MHM(Manufacture de Haute Horlogerie et Micromécanique)은 다른 이들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차분히 연구할 수 있는 작업실과 같았다. 그와 동시에 MHM은 나에게 창작의 본질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건 바로 철학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다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레더러가 탄생했다. 레더러는 시계의 심장 박동, 다시 말해, 이스케이프먼트에 전념하는 나만의 공간이다.
호기심이었다. 역사 속에서 이스케이프먼트는 언제나 시간 측정의 핵심이었다. 나는 늘 이스케이프먼트의 아름다움과 복잡함에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깨우쳤다. 나의 목표는 조지 다니엘스의 더블 휠 이스케이프먼트를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안정적이며, 현대 손목시계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경외와 재창조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나를 이끄는 별과 같은 존재다. 존 해리슨은 인내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아름다움과 정밀함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조지 다니엘스는 독립 시계 제작이란 하나의 사고방식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아울러 진정성과 상상력을 토대로 나만의 기술을 계속해서 갈고 닦을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들의 정신을 수호하고, 그들의 발명을 현대 손목시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개선하는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지속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듀얼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의 핵심은 순수한 동력 전달(impulse)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조지 다니엘스와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이스케이프먼트처럼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우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밸런스에 전달하는 동시에 오늘날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정밀도를 최적화하는 것이다.
번갈아 가며 작동하는 한 쌍의 이스케이프 휠은 밸런스에 동일한 양의 동력을 직접 전달한다. 두 이스케이프 휠은 레버에 의해 동기화된다. (주: 일반적인 팰릿 포크나 앵커 대신 레더러가 개발한 메트로놈이라는 레버를 사용한다. 메트로놈은 이스케이프 휠의 잠금과 해제를 관장한다. 잔여 동력이 감소하여 밸런스의 진폭이 줄어들면 이스케이프 휠은 메트로놈과 함께 밸런스에 간접 충격을 전달한다.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와 더블 휠 이스케이프먼트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을 통해 조지 다니엘스의 더블 휠 이스케이프먼트가 지녔던 문제를 해결했다. 게다가 셀프 스타팅도 가능하다.) 대칭 구조는 마찰을 줄이고, 에너지 전달 효율을 높인다. 특히, 레몽투아 데갈리테(remontoir d’égalité)를 통해 일정한 에너지를 전달함으로써 안정성을 향상시켰다. 듀얼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는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시적이기까지 하다. 완벽한 균형과 리듬을 통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숨쉰다.
나 자신을 믿고 끈기 있게 인내하는 것이었다. 서두르면 완벽을 기할 수 없다. 아주 미세한 조정 하나가 전체 시스템을 바꿀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의심하고 절망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좌절은 새로운 해답으로 나를 이끌었다. 결국 도전은 결실을 맺었다. 정밀함과 인내는 시계 제작의 본질 그 자체다.
현재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내추럴 이스케이프먼트는 여전히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다. 두 개의 이스케이프 휠이 기계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지 다니엘스와 내가 개발한 것처럼 독립적인 구조가 아니다. (주: 조지 다니엘스와 레더러는 기어트레인을 분리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따라서 하나의 배럴에서 생성된 에너지는 하나의 이스케이프 휠에만 동력을 전달한다.) 상호 의존적인 구조는 작동 시 훨씬 더 강한 토크를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마찰 증가, 시간 경과에 따른 마모 증가를 야기하고 종국적으로는 효율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와 달리 듀얼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는 두 개의 이스케이프 휠이 독립적으로 작동하여 더 부드럽게 에너지를 전달하고, 약한 토크에도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훨씬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렇지는 않다. 레몽투아 데갈리테는 이스케이프먼트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추가한 장치다. 듀얼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는 그 자체로 높은 정확도와 효율성을 자랑한다. 두 개의 레몽투아 데갈리테는 파워리저브가 소진될 때까지 무브먼트의 정밀함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시계에서도 보기 드문 방식이다. 나는 콘스탄트 포스 시스템을 정밀하게 구현해 밸런스 휠의 진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태엽이 완전히 감겼을 때나 거의 다 풀렸을 때나 똑같이 정밀하게 시간을 측정한다.
가프너 시스템에서 탈피한 CIC 39의 무브먼트. 수직 기둥이 달린 톱니바퀴(레몽투아 스프링이 달린 3번 톱니바퀴 아래에 위치)를 이용해 10초마다 잠금이 해제되는 플라이 휠을 제어한다.
레더러의 레몽투아 데갈리테는 고전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뢸로 삼각형(Reuleaux triangle) 캠을 이용한 가프너 시스템보다 훨씬 더 뛰어난 효율성을 가진 레몽투아 데갈리테를 만들었다. (주: 로버트 가프너가 개발한 레몽투아 데갈리테는 뢸로 삼각형 캠과 이를 제어하는 집게 형태의 레버를 이용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레더러는 트리플 서티파이드 옵저버토리 크로노미터를 비롯한 44mm 모델에는 가프너 시스템을 응용한 레몽투아 데갈리테를 사용했으나 크기가 줄어든 CIC 39에서는 가프너 시스템이 아닌 자체 개발한 레몽투아 데갈리테를 적용했다.)
CIC 39는 더 작고 정교하다. 무엇보다 안정성과 정밀함을 향상시키기 위한 진화를 이룩했다. 레몽투아 데갈리테를 재설계해 최적화했으며, 완벽한 조화를 위해 피니싱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철학은 동일하지만 더 내밀하고 응축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레더러는 이스케이프먼트의 대가들(Masters of escapements)이라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적어도 4개의 새로운 이스케이프먼트를 머지않은 미래에 추가로 선보이는 것이 목표다. 시계 제작은 매혹적인 메커니즘이나 독창적인 이스케이프먼처럼 풍부한 주제를 다룬다. 과거에 등장한 여러 발명은 오늘날 재조명할 가치가 충분하다. 재설계한 이스케이프먼트를 애호가들에게 선보이는 이유다. 시간, 연구, 프로토타입 제작 등 시계 제작은 깊은 몰입을 요구하는 힘든 여정이다. 사람들은 종종 장인정신과 속도는 반비례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혁신은 그 결과는 물론이고 그것이 달성되기까지의 인내와 헌신 그리고 제한적인 방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시계 제작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현재의 눈높이로 과거를 연구해야 한다.
시계 제작자로서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에는 놀라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나의 내면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판매까지 해야 하는 외부 세계(현실)가 존재한다. 때로는 두 세계의 거리가 매우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하는 일은 기술적이고,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시계를 만드는 것에 전념할 수 있다. 나는 큰 회사를 세우고 싶었던 적이 없다. 정밀함, 인내, 시간 그 자체를 통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부모님은 내가 워치메이커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가 내린 결정이 올바른 선택임을 증명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건 가족이다. 내 곁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아내와 딸들.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훌륭한 팀까지. 모두가 자유, 창의성, 다양성 같은 여러 가치를 포용하는 독립 시계 제작과 대형 브랜드의 차이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매력적인 다이얼, 화려한 장식의 무브먼트, 현대적인 케이스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허나 진정한 시계 제작의 예술은 이스케이프먼트를 완벽하게 다루는 것이라는 나만의 신념을 따랐다. 이 분야에 도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스케이프먼트를 향한 열정은 나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외롭고 힘겨울 때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짧은 순간이나마 강렬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빛은 나를 재충전시키고 새로운 창조 활동을 위한 힘을 준다. 나를 지탱하는 또 다른 원동력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나보다 앞서간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 두 가지 힘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하도록 채찍질한다. 시계 제작의 세계에서 시간은 결코 가르침을 멈추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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