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한국에 정식으로 진출한 레페 1839(L’Epée 1839, 이하 레페)는 천천히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흥미로운 제품들과 시계를 풀어내는 색다른 방식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녔다. 당시에 내한한 레페의 CEO 아르노 니콜라(Arnaud Nicholas)를 만나지 못했던 나는 제네바 워치 위크가 열린 지난 9월, 스위스 제네바의 리츠 칼튼 호텔에서 그와 마주했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오브제로 가득한 방안에 들어서자 살짝 흥분이 올라왔다. 문방구에서 신중하게 장난감을 고르던 소년의 날들이 이내 떠올랐다. 문방구 주인 역을 맡은 아르노 니콜라는 작품들을 직접 꺼내 들어 내게 그 의미와 가치를 설명해주었다. 인터뷰는 분량과 명확성을 위해 편집 및 요약됐다.
보통 해마다 열리는 행사에서 새로운 형태(shape)를 공개하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 아트 레지던시(Creative Art Residency) 컬렉션을 통해 16개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우리는 예술과의 협업에 주목했다. 많은 브랜드가 파트너나 막후의 아티스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른 결정을 내렸다. 레페는 파트너십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고, 시계 제조 분야에서 가장 먼저 공동으로 브랜딩한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기에 함께 일하는 아티스트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16개의 신작 가운데 12개를 아티스트들과 함께 만들었다.
새로운 형태를 출시하면 모두가 새로운 형태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는 나중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이번에는 온전히 파트너십에 집중하려 했다. 함께 일해온 모든 파트너들과 그들의 장인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든 아티스트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레페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에 그 점을 꼭 부각하고 싶었다.
레페의 거의 모든 제품은 아티스트와 함께 만든다. 플라잉 투르비용이 있는 피닉스도 그 중 하나다. 전체를 손으로 페인팅한 작품이다. 여기 있는 이 파란색 자동차(타임 패스트 D8)도 PVD 코팅이 아닌 핸드 페인팅으로 제작했다. 표면을 자세히 보면 얼마나 균일하게 칠했는지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아티스트의 비밀이다. 빛에 따라 밝은 파란색 혹은 보라색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티스트들과 작업한다. 하나의 제품을 여러 아티스트들이 번갈아 가며 작업하기도 한다. 같은 제품이라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명의 아티스트가 여러 작품을 다루거나 두 명의 아티스트가 같은 형태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아티스트끼리 비교하며 우위를 논하는 고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아티스트는 특정 제품에서 더 많은 영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 타임 패스트 “레이스드(Raced)”는 1950년대에 활약한 초창기 F1 자동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진흙탕에서 달리는 일이 허다했다. 경주 중에 자동차에서 기름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작업을 맡은 아티스트는 막 트랙을 빠져나온 것처럼 진흙과 기름을 뒤집어쓴 자동차를 떠올리며 속도와 경주를 표현했다. 다른 아티스트는 비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자동차의 속도와 오래된 이미지를 파티나 기법을 통해 구현했다. 속도를 주제로 두 아티스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차를 해석한 것이 포인트다. 이처럼 기술과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 기술적 역량과 예술적 역량을 섞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움직이는 예술 작품, 즉 키네틱 아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타임 패스트 D8을 보면 시계와 자동차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자동차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시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동차의 주요 요소를 시계에 대입했다. 시계의 정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스케이프먼트다. 그렇다면 자동차의 정확성은 어떨까? 당연히 드라이버다. 최고의 드라이버가 형편없는 차를 몰더라도 최고의 차에 탄 형편없는 드라이버보다 빠를 것이다. 우리는 정확성이라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이스케이프먼트를 드라이버처럼 운전석에 배치했다. 운전석에 있는 핸들은 12개의 리벳으로 장식했다. 12는 시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방향 조절을 하는 핸들은 시간을 조정하는 도구로 쓰인다. 바퀴에는 24개의 스포크가 있다. 24는 하루 24시간을 의미한다.
대시보드에는 열쇠가 있다. 요즘은 스마트 버튼이 대세지만 예전에는 시동을 걸려면 열쇠를 꼽고 돌려야 했다. 시동을 걸면 V8 엔진이 팬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한다. 운전석 옆에는 기어박스가 있는데 주행, 중립, 후진 모드가 있다. 주행 모드에서 자동차를 뒤로 굴리면 오토마타(V8 엔진) 태엽을 감을 수 있다. 중립 모드에서는 바퀴에 토크가 걸리지 않는다. 후진 모드에서는 시간 계측에 필요한 태엽을 감을 수 있다. 두 개의 배럴과 두 개의 기어트레인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 계측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자동차를 가지고 놀 수 있다. 차체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 가볍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경주용 자동차에서 알루미늄은 오늘날의 카본 파이버 같은 소재였다. 알루미늄은 약간 끈적거리는 성질이 있어서 굴곡진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역사적 고증을 위해서는 알루미늄을 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레페가 항상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레페는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덕분에 모두가 인정하는 기술적 노하우와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능력을 길러낼 수 있었다. 레페는 유명인사들의 브랜드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많은 귀족과 정치인들이 집이나 사무실에 레페 시계를 두고 있었다. 한때 프랑스 정부와 영국 왕실은 레페를 공식 선물로 증정하기도 했다. 전자 제품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시계는 집의 심장(heartbeat of the house)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물건이었다.
아울러 레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특허를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박람회에서 여섯 번의 골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골드 어워드는 오늘날의 노벨상에 버금가는 상이다. 노벨상은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골드 어워드는 회사나 그룹에게 주어진다. 수상자는 신청이 아닌 선출된다. 레페는 골드 어워드에 지원한 적이 없다. 수학이나 역학 등 주요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뤄내야만 골드 어워드의 영예를 얻을 수 있다. 골드 어워드를 수상한 시계 브랜드는 많지 않다. 두 번 이상 받은 수상한 시계 브랜드는 극히 적다. 그런 상을 레페는 무려 여섯 번이나 수상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레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놀라운 작품을 선보이는 이유다.
탁상 시계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탁상 시계를 만드는 회사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당시에 나는 괜찮은 탁상 시계를 하나 구해서 집에 둘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맘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멋지고 펑키한 탁상 시계를 원하는 미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나는 35살에 레페를 인수하고 탁상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실패를 예상했다. 일년에 겨우 몇 개만 만드는 작은 회사가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먹고 살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70억 명중에 이런 시계를 원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어딘 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대다수는 트렌드를 따르지만 레페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다. 트렌드를 창조하지만 역사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레페의 DNA는 기술적으로 가장 정확한 무브먼트와 뛰어난 마감 그리고 전위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레페가 50여년 전에 만든 제품을 보더라도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교하게 마무리한 무브먼트가 드러나는 캐리지 클락처럼 말이다. 그게 바로 레페의 DNA다. 다이얼이나 모양만으로는 레페를 정의할 수 없다. 시계 제작의 본질, 다시 말해 창의성을 바탕으로 시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핵심이다.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너무 극단적이면 사람들은 따라가지 못한다. ‘멋지긴 한데 너무 멀리 갔네’, ‘이해가 안 돼’ 라고 느낀다. 일반적인 제조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은 엔진부터 만든다. 시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컴퓨터, 식기세척기 등도 마찬가지다. 엔진을 만들면 디자인팀을 불러서 외장을 디자인해달라고 한다. 그 다음 마케팅팀에게 제품이 준비됐으니 팔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에 반해 레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나서 시간을 만든다. 기계를 구상하는 동시에 디자인을 만들어간다. 이러면 작품의 형태와 기능이 서로 섞이게 된다. 핸들로 시간을 조정하고, 이스케이프먼트를 운전자의 머리로 삼고, 에어 필터에 시간을 표시하는 무브먼트를 디자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모든 것은 명확한 의도를 갖고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의 제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방식은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형태를 디자인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엔진을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호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부품을 공유하고 같은 무브먼트를 썼다면 돈은 더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탁상 시계를 수집하는 컬렉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 중에는 예술을 좋아하는 컬렉터도 많다. 시계가 아니라 예술(art)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컬렉터는 레페 제품을 32개나 가지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두 번째로 많이 가진 사람은 26개를 구입했다. 어쩌면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협업은 결혼과 같다.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철학이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결혼을 하면 남편도 아내도 변한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파트너십도 마찬가지다. 둘의 관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후폭풍을 맞는다. 단기적인 이익을 노리고 협업을 진행하다가 그르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파트너를 선택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상대의 이면과 철학을 확인해야 한다. 고객을 어떻게 대하는지, 파트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공급업체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레페의 제품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다. 단, 유리, 타이어, 합성 루비 같은 부품은 만들지 않는다. 래커나 인쇄를 포함해 부품의 에칭(etching)도 직접 한다. 레페의 매뉴팩처에는 22개의 작업장이 있다. 주물은 외부에서 공급받는 대신 연마와 마감은 레페에서 이루어진다.
기본적인 차이점은 크기다. 하지만 무브먼트를 만드는 엔지니어링 방식 자체가 다르다. 탁상 시계에 사용하는 부품이 손목 시계의 부품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탁상 시계도 손목 시계처럼 정밀함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중요한 것은 무게와 에너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16년 전 회사를 인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민해온 주제다. 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선택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일 뿐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시계의 첫 번째 본질은 예술이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의 가장 주된 기능은 무엇일까? 바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메시지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자동차다. 빈티지 모델과 그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을 좋아한다. 스포츠도 좋아하는데, 특히 수상 스포츠를 즐긴다.
나는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목적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누구나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길이 없다.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과학자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과학은 사실의 영역이다.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문제를 과학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아름답다고 해서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영감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의적이다. 어린이처럼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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