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마니아들에게 날짜 창은 계륵 같은 존재다. 물론 기능적으로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다. 살다보면 의외로 급히 날짜를 확인해야 할 때가 꽤 있다. 단순한 타임 온리 워치가 아니라 뭔가 하나의 컴플리케이션이 더해졌다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기계식 시계의 경우, 이 날짜가 틀어질 확률이 꽤 높다는 것이다. 시계가 멈추면 사용할 때 날짜 세팅도 다시 해야 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바쁜 아침에 매번 날짜 세팅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어느새 날짜는 맞추지도 않은 채 착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계가 한두 개 정도라면야 멈추지 않게 관리하면서 착용할 수 있겠지만 개체 수가 증식하기 시작하면 보관함 이곳저곳에 날짜 안 맞는 시계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뭐, 좋게 포장하자면 그게 기계식 시계를 차는 사람의 정서적 여유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날짜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 뭐 이런 정신승리?
시계에서 날짜는 처음부터 ‘창문’ 형태로 등장하지 않았다. 초기 손목시계에서 날짜는 바늘로 가리키는 포인터 데이트 방식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포켓 워치 시대의 문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날짜를 즉각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웠고, 많은 정보로 인해 다이얼 역시 복잡해진다는 한계가 있었다. 손목시계는 점점 더 간결하고 직관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었고, 이때 등장한 해법이 바로 다이얼에 창을 뚫어서 날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날짜 창이 손목시계에 처음 도입된 건 1930년대 초반이다. 미모(Mimo)라는 브랜드에서 날짜 창이 있는 최초의 손목시계인 미모-미터(Mimo-meter)를 특허 등록하고 시장에 선보인 것. 이 사각 시계는 3시 방향에 창을 뚫어서 날짜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무브먼트에 새겨진 ‘PATENT’ 글씨를 통해 새로운 날짜 기술이 도입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날짜 창은 표준적인 디자인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대중적으로도 확산되지 못했다.
결국 날짜 창을 현대 손목시계의 표준으로 만든 브랜드는 롤렉스였다. 1945년 출시된 데이트저스트는 자동 무브먼트와 날짜 창을 높은 완성도로 통합한 시계였다. 특히 자정에 날짜가 즉각 바뀌는 데이트저스트 메커니즘은 이후 손목시계 날짜 창의 사실상 표준이 되었다. 물론 데이트저스트가 유명해진 것은 단순히 기능 때문만은 아니다. 롤렉스는 3시 방향의 날짜 창에 사이클롭스 렌즈라는 독특한 시각적 아이콘 조합했는데, 날짜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이 장치는 오늘날까지 롤렉스를 상징하는 디자인 중 하나다. 데이트저스트 이후 날짜 창은 시계 디자인의 기본 요소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 많은 시계 회사들이 이 문법에 따라 날짜 창을 넣고 있다.
초기 데이트 워치는 대부분 기존 베이스 무브먼트 위에 날짜 모듈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날짜 디스크는 보통 무브먼트의 가장자리를 따라 회전했는데, 크라운이 위치한 3시 방향이 기계적으로 가장 손쉽게, 수정을 최소화하면서 날짜 메커니즘을 추가할 수 있는 위치였다. 또한 3시 방향은 오른손잡이가 왼손에 착용했을 때 가장 빠르고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롤렉스가 3시 방향에 데이트를 배치하면서 이것이 마치 시계 업계의 표준처럼 굳어져 버렸다.
날짜 창이 도입된 초기에는 날짜만 빠르게 변경할 수 있는 ‘퀵셋 데이트’ 기능이 없었다. 1950년대에 와서야 용두를 한 단계 뽑아서 편리하게 날짜 변경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날짜 기능도 본격적으로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1956년에는 롤렉스가 ‘데이-데이트’를 출시하면서 요일 정보 역시 창을 통해 다이얼에 본격적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특히 1960~70년에는 사무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주 5~6일 근무에 맞춘 일정 관리가 일상화되면서 날짜 요일 조합이 점점 흔해졌다.
디자인의 변화를 주기 위해 날짜 창의 위치도 자유로워졌다. 날짜 창을 6시에 배치해 균형을 도모하기도 했고, 9시나 12시에 배치해 파격적인 변화를 주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기계식 시계의 부활과 함께 날짜를 표시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를 선도한 브랜드는 랑에 운트 죄네였다. 1994년 랑에는 랑에1으로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구현하면서 빅 데이트 컴플리케이션의 현대적 기준을 제시했다. 두 개의 디스크가 점핑하면서 날짜를 알려줌으로써 가독성과 기계적 미학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또 일부 하이엔드 브랜드에서는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 기능을 구현해 일반적인 날짜 기능과 차별화하기도 했다.
3시 창이 좋아? 6시 창이 좋아?
이건 정말 ‘개취’의 영역이다. 일단 정석은 3시 방향이다. 가독성 측면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위치이기도 하고, 롤렉스의 데이트저스트를 통해 공식처럼 굳어진 자리다. 다만 다이얼의 좌우 밸런스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6시 방향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날짜 창에 프레임 있는 게 좋아? 없는 게 좋아?
일반적으로는 프레임이 있는 쪽이 더 고급스럽다. 하지만 이 또한 시계에 따라 ‘케바케’다. 가독성을 높이고 날짜 창을 강조할 의도라면 프레임이 있는 게 좋다. 하지만 다이얼 디자인상 날짜를 의도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프레임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프레임이 없더라도 창 외곽에 모따기 처리를 해서 고급감을 살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 프레임보다 중요한 건 날짜 휠의 높이다. 다이얼과 날짜 휠의 단차를 최소화해야 확실히 고급스런 느낌이 난다. 날짜 폰트의 인쇄 품질이나 위치 균형도 중요하다. 고급 시계 중에서도 의외로 날짜 숫자의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이얼이랑 날짜 창이랑 색이 같은 게 좋아? 다른 게 좋아?
이것 또한 디자인 의도에 따라 다르다. 날짜를 강조하려면 다이얼 컬러와 다르게 하는 게 좋다. 다이얼과의 조화를 고려한다면 같은 색으로 통일하는 게 물론 좋다. 다만 다이얼과 날짜 휠의 컬러를 완벽하게 맞춰주는 경우는 잘 없다. 어설프게 비슷하게 맞추는 것보다는 아예 다르게 가져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데이트 창은 3시 방향, 혹은 6시 방향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다른 방향에 배치한 시계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데이트 창의 위치만 다르게 가져가도 시계의 분위기가 꽤 달라지며, 이런 시계들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도 있겠다.
태그호이어의 까레라 크로노그래프 다토는 서브다이얼을 생략하고 날짜 창을 9시 방향에 배치했다. 이는 1960년대 출시된 까레라 다토 45에서 가져온 디자인이다. 2021년 호딩키와 협업해 복각 까레라 디자인으로 ‘다토45’ 모델을 출시한 적이 있는데, 이를 글라스박스 디자인으로 다시 선보인 것. 일단 이 모델에서만 볼 수 있는 틸 그린 컬러가 눈에 띈다. 스몰 세컨즈는 생략했고 3시 방향에 1개의 30분 카운터 다이얼만 배치해 날짜 가독성을 높였다.
한편 블랙 팬더 다이얼의 까레라 크로노그래프 모델은 날짜 창이 12시 방향에 위치한다. 이 또한 과거 빈티지 까레라의 디자인에서 가져온 것으로 개성이 넘치며, 6시 방향 서브 다이얼 디자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장점. 다만 크로노그래프 워치 특성상 평소에는 날짜 창을 가려버린다. 실용성보다는 헤리티지와 유니크함에 의미를 둬야 할 듯.
서브다이얼이 3시, 6시, 9시 방향에 배치된 크로노그래프의 경우 서브 다이얼과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날짜 창이 4시 30분 방향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배치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3시나 6시처럼 뭔가 자연스러운 위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위치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 많은 애호가들은 이 위치가 다이얼의 균형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가독성 역시 좋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각 날짜 창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도 기울어져서 표시되기 때문에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벨앤로스의 사각시계 BR-03은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아니지만 숫자 인덱스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4시 30분 방향에 작게 원형 날짜 창을 배치했다. 창을 아주 작게 뚫어서 대충 지나치면 마치 논데이트 시계처럼 보인다. 원형 프레임을 적용해 4시 30분 방향임에도 날짜가 기울지 않고 똑바로 표시되는 게 특징. 이는 크로노그래프 모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서브다이얼이 2개인 바이 컴팩스 크로노그래프의 경우 날짜 창은 대부분 6시 방향에 위치하는데, 위블로의 유니코 무브먼트는 칼럼휠과의 간섭 때문인지 날짜를 3시 방향에 서브다이얼과 중첩되도록 배치했다. 남들이 다 피하는 길을 굳이 걷는 것. 이 또한 유니코의 유니크함이랄까.
데이트 창이 표준이 된 지금 시점에서 과거의 포인터 데이트 방식은 오히려 시계의 빈티지한 멋과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가독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포인터 데이트 방식의 장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한 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달에 내가 얼마나 시간을 보냈고, 현재 어느 시점에 있으며, 앞으로 며칠이 남아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시간을 계획하고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장점이 된다.
포인터 데이트 기능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하면 역시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트. 신형 모델은 포인터 핸즈의 팁 부분을 삼각형 모양으로 디자인했는데, 인덱스는 모두 화이트로 처리하고 오직 포인터 핸즈 끝에만 컬러 변화를 줘서 가독성을 최대한 확보했다. 파스텔 톤 중심으로 다양한 컬러가 준비되어 있으며, 포인터 핸즈의 팁 부분 컬러는 각 다이얼 컬러에 따라 차별화했다. 물론 기존 코인 베젤 디자인도 선택할 수 있다.
컴플리트 캘린더 모델 역시 대체로 요일과 월은 창으로 보여주고 날짜는 핸즈로 가리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트래디셔널이나 피프티식스의 컴플리트 캘린더가 대표적이며, 블랑팡의 빌레레 컬렉션에서도 컴플리트 캘린더 모델을 만나볼 수 있다. 보통 포인터 데이트 방식은 날짜 인덱스를 다이얼의 가장 바깥쪽에 배치하는데 블랑팡의 경우 아워 마커 안쪽에 배치해서 시간 가독성에 좀 더 힘을 실었다. 자칫 부족할 수 있는 날짜 가독성은 핸즈의 독특한 곡선 디자인으로 커버했다.
노모스의 탕겐테 네오마틱 41 업데이트 모델은 포인터 데이트 방식을 응용해 가독성을 높인 방식이다. 일단 다이얼 외곽에 아라비아 숫자를 배치하고 그 숫자 사이에 창을 뚫었다. 숫자 좌우에 배치된 2개의 홀에 컬러가 표시되면서 해당 날짜를 표시하게 된다. 한 달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전통적인 포인터 데이트의 장점과 빠르게 날짜를 읽는 날짜 창의 장점을 조합한 독특한 데이트 워치다.
날짜를 서브 다이얼 영역에 핸즈로 작게 표시하는 시계들도 있다. 주로 다이얼에 많은 정보를 넣어야 하는 퍼페추얼 캘린더 워치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인데, 문페이즈 워치나 심플한 디자인의 시계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퍼페추얼 캘린더 워치의 레이아웃에서 날짜 창만 남겨둔 셈. 사실 날짜 자체의 가독성 측면에서는 가장 읽기 어렵고 불편하다. 하지만 메인 다이얼의 디자인과 가독성을 헤치지 않으면서 서브 다이얼을 하나의 디자인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복잡한 점프 메커니즘이나 추가 디스크 없이도 안정적으로 구동하기 때문에 울트라씬이나 클래식한 드레스 워치에 주로 사용된다.
이쪽 계열의 대표적인 시계로는 예거 르쿨트르의 마스터 울트라씬 문페이즈를 들 수 있겠다. 6시 방향 서브 다이얼에 날짜 포인터와 문페이즈 디스플레이가 통합된 디자인이다. 덕분에 여러 정보를 표시하지만 극도로 정제된 다이얼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문페이즈 디스크(29.5일)와 날짜 포인터(31일)는 작동 주기가 비슷하기 때문에 같이 배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무브먼트를 얇게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필연적인 디자인일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디자인의 범용 무브먼트 모델로는 론진의 마스터 콜렉션 문페이즈가 있다.
레이아웃의 참신함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모델은 IWC의 포르토피노 컴플리트 캘린더 모델이다. IWC가 새롭게 개발한 컴플리트 캘린더 모듈을 장착한 시계로, 포르투기저 크로노그래프 모델의 아이코닉한 12시, 6시 서브 다이얼 디자인을 캘린더 워치로 재해석했다. 12시에는 요일과 문페이즈, 6시에는 월과 날짜가 통합되어 있어서 위아래 대칭의 미학을 보여준다. 특히 6시 방향의 월과 날짜는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동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직관적으로 정보를 읽을 수 있다.
파텍 필립에도 날짜 서브 다이얼 모델이 많은 편이다. 노틸러스 5712는 독특한 비대칭 레이아웃이 특징인데, 특이하게도 7시 방향에 날짜와 문페이즈가 통합된 서브다이얼이 위치한다. 장르는 스포츠 워치지만 다이얼의 구성이나 디자인은 꽤나 고전적인 스타일. 그밖에 칼라트라바 파일럿 트래블 타임 5524G, 8데이즈 파워리저브를 갖춘 컴플리케이션 5328G 등에도 날짜 서브 다이얼을 찾아볼 수 있다.
날짜 기능을 조금 더 특별하게 즐기고 싶다면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 모델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레트로그레이드’는 과거 포켓워치와 탁상시계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정보를 표시하던 방법을 의미한다. 시·분·초, 요일, 날짜 등의 정보가 연속적으로 증가하다가 끝에 도달하면 순간적으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다. 이 방식은 원래 가독성보다는 기계 장치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탄생했다. 하지만 한정된 다이얼 안에 보다 많은 정보를 집약해서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초 손목시계 시대에 와서도 고급 제품에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쿼츠 위기 이후에는 기계식 시계의 개성과 창의력이 중요해지면서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이 일종의 표현 양식으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레트로그레이드는 다양한 기능에 적용할 수 있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 날짜를 표시하는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다. 기계적인 움직임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지만, 한 달 전체를 파악하기에도 일반적인 원형 포인터 데이트 모델보다 용이하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포켓 워치는 물론 초기 손목시계 시절부터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 워치를 다수 제작했으며, 그 전통을 현재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패트리모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는 다이얼 상단에 부채꼴 형태로 날짜 인디케이터를 배치하고, 하단에 문페이즈 인디케이터를 배치했다. 문 페이즈 인디케이터 대신 요일을 배치한 페트리모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데이트 모델도 있다.
브레게의 트래디션 콴티엠 레트로그레이드 7597은 패트리모니 레트로그레이드와 반대로 6시 방향으로 날짜 창이 배열되어 있다. 다이얼 쪽으로 무브먼트가 드러나는 모델이기 때문에 내부 무브먼트 부품 위로 지나갈 수 있도록 중앙 핸즈를 구부려서 디자인했다.
로저드뷔도 지난해 창립 30주년을 맞아 여러 레트로그레이드 모델을 선보였다. 브랜드 창립자 미스터 로저 드뷔가 생전에 즐겨 사용하던 컴플리케이션이 바로 레트로그레이드였기 때문. 과거의 로저드뷔를 추억하고 싶다면 오마주 라 플라시드 퍼페추얼 캘린더 모델이 좋겠지만 가격대와 현재 로저드뷔 디자인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엑스칼리버 바이레이트로그레이드 캘린더가 적당할 것 같다. 3시 방향에 레트로그레이드 날짜, 9시 방향에 레트로그레이드 요일을 적용했고, 부분적으로 오픈 워크가 가미되어 보는 맛이 있다. 40mm의 사이즈로 선보이는 최초의 엑스칼리버 모델이라는 것도 주목할 부분. 자금이 넉넉한 사람을 위해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를 모두 담아낸 엑스칼리버 그랜드 컴플리케이션도 준비되어 있다.
가독성에만 집중한다면 빅 데이트 방식이 가장 뛰어난 날짜 표시 방식일 거다. 이 분야의 선구자 랑에 운트 죄네에서는 다양한 컬렉션에서 아웃사이즈 데이트 모델을 선택할 수 있다. 아웃사이즈 기능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상징성을 고려하면 랑에 1 컬렉션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맞을 것 같다. 랑에 1의 아웃사이즈 데이트는 날짜 창 주위에 금속 프레임을 배치해서 두 개의 숫자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 놓았다. 데이트의 위치는 대체로 1시 방향인데, 랑에 1 퍼페추얼 캘린더나 랑에 1 데이매틱처럼 반대로 11시 방향에 위치하는 모델도 있다. 보다 전형적인 형태의 삭소니아 컬렉션에는 균형미를 위해 12시 방향에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배치했고, 스포츠 워치 오디세우스는 9시 방향의 요일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3시 방향에 아웃사이즈 데이트를 배치했다.
같은 독일 글라슈테 지역의 글라슈테 오리지널의 경우, 두 디스크를 완전히 같은 평면에 배치했다. 덕분에 중앙 분리선이 거의 보이지 않고 날짜가 하나의 큰 숫자처럼 읽힌다. 굳이 이 브랜드에서 빅 데이트를 ‘파노라마 데이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프레임으로 두 숫자를 분리해 놓은 랑에 운트 죄네의 ‘아웃사이즈 데이트’와 좋은 대척점을 이룬다.
한편 제니스는 최근 빅 데이트 컴플리케이션의 새로운 혁신을 보여줬다. 제니스 빅 데이트 플라이 백에 탑재된 엘 프리메로 3652는 특허받은 컴플라이언스 메커니즘을 탑재해 두 개의 휠을 0.02초만에 전진시켜 0.007초만에 정확한 날짜 변경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직접 조작해보면 순식간에 바뀌는 큼직한 숫자가 꽤 만족감을 준다.
최근에는 좀 더 대중적인 스위스 브랜드에서도 기계식 빅 데이트 기능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미도의 멀티포트 TV 빅 데이트가 있다. ETA의 80시간 파워리저브 무브먼트에 빅 데이트 모듈을 올리는 방식으로, 두 디스크가 동시에 점프하진 않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빅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미도의 베스트셀링 모델이다.
날짜 창의 숫자 디자인을 변주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시계들도 있다. 오리스는 디즈니의 개구리 커밋과 콜라보레이션하여 그린 다이얼의 프로파일럿 X 모델을 선보였다. 바로 프로파일럿 X 커밋 에디션이다. 티타늄을 제작한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에 형광빛이 감도는 그린 다이얼을 조합하여 통통 튀는 개성을 선사한다. 이 시계의 백미는 특별하게 디자인한 날짜 창이다. 오리스는 바쁜 인생에서 한 템포 쉬어가자는 취지로 매월 1일을 ‘커밋데이’로 설정했다. 이 날에는 날짜 창에 숫자 대신 웃고 있는 커밋 캐릭터가 나타나 릴렉스하는 날임을 알려준다. 한 달에 단 하루만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미소를 짓자는 취지다. 웃음기 가득한 외모와 달리 안쪽은 사뭇 진지하다. 인하우스 칼리버 400은 뛰어난 항자성과 5일 파워리저브를 갖췄으며, 10년 보증과 서비스 주기를 제공한다.
태그호이어 까레라 크로노그래프 X 프래그먼트 리미티드 에디션은 프래그먼트 디자인과 협업한 까레라다. 프래그먼트는 일본 스트리트 패션의 대부 히로시 후지와라(Hiroshi Fujiwara)가 설립한 패션 브랜드로, 미니멀한 디자인과 세련된 스타일을 추구한다. 이 시계 역시 그런 프래그먼트의 디자인 철학인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다이얼은 일반 모델에 비해 심플하다. 우선 화이트 플랜지와 블랙 오팔린 다이얼이 강렬하게 흑백의 대비를 이룬다. 양각 아워 마커를 사각 도트로 처리했고, 서브 다이얼 인덱스 역시 눈금만으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매월 1일과 11일에는 일반적인 숫자 대신 번개 모양의 프래그먼트 로고로 날짜를 표시한다. 케이스백의 사파이어 크리스털에도 번개 로고를 프린팅했다. 비즈 오브 라이스 브레이슬릿의 중앙 파츠에 블랙 PVD 코팅 처리를 한 것도 독특한 부분.
오메가는 2026년 동계올림픽을 기념하여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38 밀라노 코르티나 2026 모델을 선보였다. 단순히 컬러만 바꾼 기념 에디션이 아니라 디자인이 꽤 많은 변화를 주었다. 부분 변경이 이뤄진 첫 번째 스피드마스터 38mm 모델인 셈. 일단 베젤에 있던 홈을 없애면서 인서트 영역이 넓어졌다. 이번 밀라노 코르티나 2026 모델은 화이트 에나멜로 타키미터 눈금을 새긴 블루 세라믹 인서트를 장착했다. 인덱스와 서브 다이얼의 디자인도 스피드마스터 문워치에 더 가까워졌다. 이번 모델의 다이얼은 동계 올림픽의 겨울 분위기를 연출했다. 화이트 바니시 처리한 다이얼에 밀라노 코르티나 2026 올림픽 엠블럼에서 영감을 얻은 전사 처리한 프로스팅 블루 컬러와 섬세한 무늬를 입힌 것. 크로노그래프 초침도 파란색으로 그러데이션 처리했다. 브레이슬릿 역시 38mm 모델 최초로 문워치와 같은 스타일의 신형 메탈 브레이슬릿을 채택했다. 매월 26일에는 밀라노 코르티나 2026 올림픽의 앰플럼과 동일한 폰트로 날짜를 표시한다.
시계와 데이트할 때 틀어진 날짜 창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뭔가 고장난 시계를 착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 그리고 날짜 창이 다이얼의 균형을 깨버리기 때문에 애초부터 미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다. 마니아들이 날짜 창 없는 타임 온리 워치를 선호하는 이유다. 하지만 시계 입문자들에게 데이트 창은 없으면 허전한 필수 컴플리케이션 중 하나다. 무엇보다 잘 설계된 데이트 컴플리케이션은 사용자에게 꽤 만족감을 준다. 분명한 건 데이트 기능이야말로 시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컴플리케이션이며, 가장 합리적인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컴플리케이션이라는 점이다. 틀어진 날짜를 계속 수정해주면서 한 번이라도 더 그 시계를 쳐다보게 되고 그러면서 정도 들게 된다. 그러니 무작정 ‘타임 온리’를 외치기보다 가끔은 날짜 기능 자체에 주목해서 시계를 선택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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