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스포츠 워치: 로랑 페리에 스포츠 트래블러
머무르지 않는 삶을 위하여
- 이상우
- 2026.07.23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필리어스 포그의 하인 파스파르투는 대대로 물려받은 회중시계를 지니고 다닌다. 여행 중에 그는 현지 시간에 맞추지 않고 항상 런던의 시간을 유지한다. 물론 그 탓에 시계는 가는 곳마다 현지 시각과 어긋났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에서 시간은 뜻밖의 방식으로 그들의 편이 되어 준다. 동쪽으로 지구를 돈 포그 일행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하루를 벌었고, 그 덕분에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처럼 여행이란 공간의 이동인 동시에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여행의 동반자였다.
가장 오래된 증거는 18세기 중반 발굴된 ‘포르티치의 프로슈토’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길이는 11센티미터 남짓이고 은도금된 표면에 돼지 뒷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의 정체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로마의 휴대용 해시계다. 끈에 매달아 늘어뜨리면 몸통에 새겨진 격자 위로 그림자가 만들어졌고, 사용자는 그림자 끝을 월별 세로선에 맞추고 가로선을 세어 시간을 읽었다. 이처럼 시간을 지니고 다니려는 욕망은 기계식 시계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기술 발전과 함께 욕망은 보다 정교해졌다. 16세기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태엽의 보급과 함께 몸에 지닐 수 있는 소형 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후대에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라 불린 이 물건들은 흔히 자물쇠 장인 페터 헨라인(Peter Henlein)의 발명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당시 여러 장인들의 동시다발적 성취라고 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 시계들이 목걸이로 걸거나 주머니에 넣는 물건, 즉 몸과 함께 이동하는 물건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여행용 시계라는 장르가 뚜렷한 형태를 얻은 것은 그로부터 두 세기 정도 지나서다. 1798년 4월, 이집트 원정을 한 달여 앞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파리의 브레게 공방에서 시계 세 점을 구입했다. 리피터 회중시계, 퍼페추얼 회중시계, 그리고 캘린더와 리피터를 갖춘 여행용 시계 No. 178이다. 브레게의 기록에 따르면 8일 파워리저브에 사방이 유리로 마감된 이 No. 178은 이후 ‘캐리지 클락’ 혹은 ‘펜뒬 드 부아야주(pendule de voyage)’라 불리게 될 장르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한 세기 동안 캐리지 클락은 유럽 여행 문화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이 시계를 마차에 싣고 여행을 떠났다.
마차에 캐리지 클락을 싣고 여행을 떠났던 귀족들이 지금 시점에서 여행용 시계를 고른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까? 로랑 페리에의 신작 스포츠 트래블러는 아마도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일 것이다. 스포츠 트래블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포츠 오토’ 모델에 ‘트래블러’ 기능을 접목한 시계다. 원래 로랑 페리에는 클래식 라인업에 트래블러 시계가 있었는데, 그 트래블러 콘셉트를 스포츠 오토 컬렉션에 이식한 것이다. 즉 클래식 트래블러의 DNA를 스포츠 오토의 DNA와 교배시킨 모델이라 하겠다.
케이스 형태는 기존 스포츠 오토와 거의 동일하다. 지름은 42mm, 두께는 13.3mm이며, 5등급 티타늄 소재를 사용했다. 토노형 케이스에 쿠션형 베젤을 조합했는데, 여타 브랜드의 양산형 통합 브레이슬릿 스포츠 워치와 차별화된 디자인을 갖췄다. 특히 쿠션형 베젤은 이 시계에 볼륨감을 더하는 요소다. 그레이 컬러의 다이얼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절제된 멋을 보여주지만, 베젤이나 브레이슬릿에서는 마초적인 멋이 느껴진다. 마치 수트 안에 근육질을 숨기고 있는 첩보 요원의 느낌이랄까. 글라스는 살짝 볼록한 돔형으로, 쿠션형 베젤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크라운은 양파처럼 둥근 모양이라 조작이 편리하고, 스크루 다운 방식이라서 물속에서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방수 성능은 100미터까지 지원한다.
브레이슬릿은 3열로 구성되어 있다. 큼직한 중앙 링크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을 완성한다. 각 링크는 수직 새틴 브러싱 처리를 했고, 에지 부분에는 폴리싱 처리를 해서 대비 효과를 줬다. 보통 일체형 브레이슬릿 스포츠 워치들은 시계와 스트랩의 일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각 링크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스포츠 트래블러의 경우, 브레이슬릿의 링크 사이 간격이 살짝 넓은 편이다. 하지만 링크의 볼륨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빈 공간이 넓어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링크의 굴곡과 그 사이 공간의 대비가 새로운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손목에서 더 편안한 것은 물론이다. 브레이슬릿 역시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5등급 티타늄 소재로 제작했다. 측면 라인이 케이스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이 돋보인다.
다이얼 디자인은 로랑 페리에 특유의 문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특히 투창 형태의 아세가이 핸즈는 로랑 페리에를 대표하는 디자인 중 하나다. 핸즈는 18K 화이트 골드로 제작했고, 안쪽에는 민트 그린 컬러의 슈퍼 루미노바를 채웠다. 다이얼의 그레이 컬러와 핸즈·인덱스의 민트 그린 조합이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개성을 드러낸다. 당연히 가독성에도 도움을 주는 색 조합이다. 6시 방향 스몰 세컨즈는 스네일 패턴으로 피니싱에 차이를 두었고, 얇은 바톤 형태의 핸즈를 배치했다. 센터 세컨즈가 아닌 클래식한 스몰 세컨즈 방식을 고수하는 부분에서 브랜드가 어떤 스포츠 워치를 지향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중앙에는 십자 형태의 라인으로 다이얼의 섹터를 구분했고, 9시 방향에 홈 타임 표시 창을, 3시 방향에는 날짜 창을 배치했다. 2개의 창 옆에는 넓은 경사면을 만들어 디자인에 변화를 주는 동시에 가독성도 함께 확보했다.
케이스 왼편에 위치한 두 개의 푸셔는 로컬 타임을 제어한다. 10시 방향 푸셔를 누르면 시침이 한 시간 앞으로 이동하고, 8시 방향 푸셔를 누르면 뒤로 되돌린다. 이 조정은 무브먼트를 멈추지 않고 이루어지므로, 시계는 계속 정확도를 유지한다. 덕분에 여행 중에도 시계를 벗지 않고 푸시 버튼으로 편리하게 현지 시간을 바꿀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다이얼 레이아웃이다. 로랑 페리에는 표시 정보가 늘었음에도 다이얼을 절제된 상태로 유지한다. 중앙에 시·분침을 두고 6시 방향에 스몰 세컨드를 배치해 마치 평범한 3핸즈 워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GMT 컴플리케이션은 두 개의 개구부에 은밀하게 통합되어 있다. 3시 방향에는 날짜, 9시 방향에는 24시간 형태로 두 번째 시간대(홈 타임)를 표시한다. 이 시계에는 여타 GMT 워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24시간 베젤도, 별도의 중앙 24시간 핸즈도 없다. 홈 타임은 작은 창 안의 숫자로만 표시될 뿐이다. 과연 절제의 미학을 우선시하는 로랑 페리에다운 선택이다.
무브먼트도 주목할 만하다. 스포츠 트래블러에는 신형 매뉴팩처 칼리버 LF275.01이 탑재된다. 마이크로 로터 방식의 자동 무브먼트로, 72시간 파워 리저브와 4Hz(28,800vph)의 진동수를 갖췄다. 마이크로 로터 방식이라 얇은 두께를 유지하면서도 무브먼트 전체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고급 시계답게 마이크로 로터에는 플래티넘 소재를 사용했으며, 묵직하면서도 민첩하게 회전하는 감각이 인상적이다. 로터를 지지하는 고전적인 브리지 덕분에 와인딩의 신뢰감이 배가된다.
이번 무브먼트에서 주목할 것은 탈진기의 변화다. 로랑 페리에의 트래블러 컴플리케이션은 그동안 내추럴 이스케이프먼트를 갖춘 LF230 플랫폼과 짝을 이뤄왔으나 이 방식은 극도로 정밀한 공차에 의존하기에 스포츠 워치의 거친 환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스포츠 트래블러에는 일반적인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가 적용되었다. 스포츠 오토를 출시하면서 개발한 LF270.01에 내추럴 이스케이프먼트 대신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를 적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선택은 브랜드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다소 아쉬울 수 있지만, 도구로서의 시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이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거친 환경에 던져지는 일이다. 시계는 다양한 상황에서 충격을 받을 확률이 높고, 착용자의 손목 역시 여행 내내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정교하지만 예민한 탈진기 대신 충격과 진동에 강한 구조를 택한 것은 ‘여행용 스포츠 워치’라는 정체성에 정확히 부합한다.
스포츠 워치에 맞게 튜닝되었지만 무브먼트의 피니싱은 여전히 하이엔드에 걸맞은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스포츠 워치에 어울리도록 그레이 톤으로 모던하게 마감되어 있으면서도, 곳곳에서 장인의 하이엔드 피니싱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 마이크로 로터를 양쪽에서 지지하는 브리지가 대표적이다. 핸드 피니싱한 브리지와 반원 형태의 마이크로 로터가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보이는 것도 재밌다. 주얼 주변의 베젤링 처리, 핸드 폴리싱 처리한 나사 부품들의 마감도 수준급이다.
무브먼트 브리지는 크게 3개로 분할했는데, 각 브리지 사이의 분할된 공간이 꽤 넓어서 기어트레인이나 시계의 여러 부품들을 관찰할 수 있다. 밸런스 휠 영역과 마이크로 로터 영역이 센터 휠을 중심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멋지다. 참고로 마이크로 로터 중심부에는 아주 작은 글씨들이 말 그대로 ‘깨알같이’ 각인되어 있는데, 이는 창립자 로랑 페리에가 1979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펼쳤던 영광과 모터스포츠 헤리티지를 기념하는 문구와 숫자들을 조합한 것이다. 이처럼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시계 구석구석에는 스포츠 워치의 DNA가 흐르고 있다.
좋은 여행 도구란 사용자가 그 존재를 잊을 만큼 손에 익는 물건이다. 스포츠 트래블러의 절제된 다이얼과 견고한 무브먼트, 가벼운 티타늄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클릭 한 번으로 갱신되는 시침은 결국 시계가 손목 위에서 물러나고 여행이라는 경험만 남기기 위한 장치들이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여행에 굳이 시계는 필요하지 않다. 스마트폰은 착륙과 동시에 현지 시각으로 바뀌고, 첨단 GPS 장치가 위치 정보까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시계 산업은 여전히 트래블 워치를 만들고, 여행자들은 여전히 기계식 GMT 워치나 월드타이머를 착용한다.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철학이란 본래 향수병이며, 어디에서나 집에 있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썼다. 스포츠 트래블러의 9시 방향 홈 타임 디스플레이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언젠가 다시 돌아갈 곳의 시간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파스파르투가 계속 런던 시각을 고집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해시계를 주머니에 넣던 로마인부터 GMT 바늘을 서울에 맞춰 두고 공항으로 향하는 오늘의 여행자까지, 시계가 여행에서 맡아 온 역할은 결국 낯선 곳의 한복판에서 익숙한 시간의 끈을 놓지 않게 해 주는 것이었다. 꼭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머무르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삶을 동경한다면, 그리고 언젠가 다시 원래의 페이지로 돌아올 것이라면 스포츠 트래블러가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
- 크기 :
- 42mm
-
- 두께 :
- 13.3mm
-
- 소재 :
- 5등급 티타늄
-
- 유리 :
- 사파이어 크리스털
-
- 방수 :
- 100m
-
- 스트랩 / 브레이슬릿 :
- 티타늄 브레이슬릿
-
- 다이얼 :
- 슬레이트 그레이
-
- 무브먼트 :
- 칼리버 LF275.01
-
- 방식 :
- 셀프 와인딩
-
- 기능 :
- 시, 분, 스몰 세컨드
-
- 시간당 진동수 :
- 28,800vph
-
- 파워리저브 :
- 약 72시간
-
- 가격 :
- 1억2200만원
로그인하거나 가입하여 댓글을 남겨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